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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의 물건 > 김정운, 2012

by Ditmars 2021. 2. 5.

<남자의 물건> 김정운, 2012

 

 어떤 뛰어난 건축가도 개미의 건축 능력을 뛰어넘을 수 없다. 개미가 집단으로 이뤄내는 건축물은 완벽하다. 그러나 인간이 개미보다 위대한 이유는 건축물의 완성된 모습을 머릿속에 미리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 <자본론> 마르크스

<p.32>

 

 불안하면 자꾸 짜증 내며 주위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같은 원리다. 자신의 불안한 내면의 원인이 분명치 않으니 외부에서 그 원인을 찾아 정당화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바깥의 적은 그리 만만치 않다. 그래서 스스로를 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불안할수록 사람들은 그 불안의 원인을 자기 내부에서 찾는다. 그래야 문제의 내용은 물론 해결책도 간단해지기 때문이다. 착하거나 혹은 비겁한 이들의 특징이다.

<p.64>

 

 심리학의 창시자인 빌헬름 분트는 인간이 경험하는 '현재'의 길이를 측정했다. 약 5초 정도라고 한다. 우리는 불과 5초 만을 느끼며 살아간다는 이야기다. 과거나 미래를 사는 게 아니라 오직 현재를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5초의 객관적 단위는 주관적 경험에 의해 얼마든지 팽창될 수 있다.

<p.71>

 

 새벽에 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를 잡아먹는다는 것은 그렇다 치자. 그럼 새벽에 일찍 일어난 벌레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일찍 일어나 기껏 잡아 먹히기 밖에 더하는가?

<p.73>

 

 리더는 훌륭한 사회자가 되는 것을 뜻한다. 상대방을 폼나게 만들어줘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남에게 순서를 안 준다. 폼날수록 자기만 이야기한다.

<p.84>

 

 심리학에서 '아이덴티티', 즉 어떤 것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관계 유지의 필수 조건이다. 그러나 사회적 지위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처럼 불안한 일은 없다. 사회적 지위는 반드시 사라지기 때문이다.

<p.132>

 

 서구 근대성이 필연적으로 끌고 들어온 내용과 형식의 괴리를 극복하려는 신영복의 1차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이었다. 대상화, 타자화, 분석에서 이해, 공감으로의 변화다. 그런데 그것만큼이나 더 먼 여행이 또 신영복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슴에서 발'까지의 2차 여행이었다. (...)
 이해와 공감이라는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1차 여행이 변화와 발전이라는 '가슴에서 발까지'의 2차 여행으로 이어지는 데 또 수년이 걸렸다. 그 변화와 발전은 인간관계 속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신영복은 반복해서 강조한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충분히 설 수 있을 때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변화와 발전이란 결국 이 성숙한 인간관계의 내면화에 다름 아니라는 이야기다.

<p.185>

 

 삶이란 목적을 사는 게 아니라, 과정을 사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물론 목적이 중요하다. 그러나 목적에 의해 과정이 생략된 삶을 사는 것처럼 불행한 삶이 없다.

<p.187>

 

 모든 사람은 자기보다 잘난 사람에게서 약점을 찾아내고, 그의 약점으로 자신을 위로하고 싶어 한다. 자신과는 아무리 차원이 다른 사람일지라도 약점을 찾아내 위로받으려 한다. 아주 못됐다. 특히 남자들이 더 그런다. 그래야 자신의 존재가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약점이 눈에 잡히지 않으면 이유 없이 미워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세상에 무서운 게 남자의 시기 질투인 거다.

<p.195>

 

 "군대 경험 이후에 뭐 이렇게 생각하지요. 겪어보지 않은 일에 대해서도, 내가 안 해봤지만 잘할 수 있을 거야. 과거에 다 뭐 겪어보지 않은 일들 잘들 해왔잖아."
 - 문재인

<p.225>

 

 '천재의 기억보다 바보의 기록이 정확하다.'

<p.274>

 

 승승장구, 탄탄대로를 달릴 때에는 과거의 긍정적 사건들만 기억난다. 힘든 기억들조차 의미 있는 고통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현재가 어렵고 견디기 어려우면 끊임없이 힘들고 괴로웠던 일들만 기억난다. 힘든 현재가 고통스런 과거를 불러내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p.282>

 

 "예를 들어서 내가 KBO 총재인데 야구경기에 작전 지시를 하면 돼요? 안 되죠. '번트를 대라', '뛰어라' 그건 내가 하면 안 되잖아. 감독이나 코치가 할 일이지. 그런데 사람들은 착각한다구. KBO 총재면 야구의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는 거지. 결국은 학교도 마찬가지지. 교수가 할 일이 있고, 총장이 할 일이 있고, 이사장이 할 일이 있고... 일이 다른데. 이사장이 학교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할 때부터 뭔가 잘못된 거라고. 시간이 남으면 딴짓을 하게 되고, 시간이 남으면 월권을 하게 되고, 시간이 남으면 공상을 해가지고 결국은 문제를 일으키거든."
 - 유영구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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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기 전까지는 관심이 없었는데 책을 다 읽고 글을 적어보려고 하니 책 표지의 '문화심리학'이라는 용어가 눈에 들어왔다. 문화와 심리를 연구하는 학문일 거라는 짐작은 갔지만 정확히 알아보니 서로 다른 문화권에 있는 사람의 심리적 차이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한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심리학 연구의 대부분은 서구-백인 문화권을 기반으로 하여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결과를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라고 여기는 것에 대하여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문화의 차이에 따라 심리의 차이가 생길 수 있다는 문제제기가 있었고 이를 시초로 문화심리학이 발달하게 되었다. 즉, 인간 심리의 근본 원인을 인간의 유전적, 생물적 특성을 통해 찾으려고 했던 기존의 연구와 다르게 후천적 요인이라고 할 수 있는 문화적, 사회적 특성을 통해 찾으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기에는 당연하게 들리는 말인데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나 보다.

 

 문화심리학이 무엇인지 알고 나니 뒤늦게 김정운 작가가 책의 전반부에 적었던 글들이 이해가 되었다. 작가는 한국 사회의 문화적 특성을 파악하고 그 특성이 한국의 중년 남자의 심리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설명한 것이다. 그리고 그 설명은 쉽고 재미있다. 한국의 남자이긴 하지만 중년이라고는 할 수 없는 나에게도 왠지 모르게 공감이 되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한국 사회의 중년 남자들이 왜 저렇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그 이유가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고 자란 한국 사회 문화에 있다는 것에 한편으론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그들은 조국과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았을 뿐이다. 만약 지금 중년 남자의 모습에서 어떠한 문화적 후진성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한국 사회라는 갱도를 지나오면서 묻을 수밖에 없었던 탄가루 같은 것이 아닐까. 그리고 광부의 얼굴에 묻은 탄가루를 보고 그 사람은 더러운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책의 후반부는 작가가 각계각층 다양한 분야의 12명의 중년 남자들을 만나 인터뷰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터뷰의 주 내용은 그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물건이고 그 물건에 대한 이야기이다. 12명의 중년 남자들은 다음과 같다. 김갑수, 윤광준, 이어령, 신영복, 차범근, 문재인, 안성기, 조영남, 김문수, 유영구, 이왈종, 박범신. 그리고 작가 본인의 만년필에 대한 이야기도 적혀 있다. 개인적으로는 들어 본 사람도 있고 들어 본 적도 없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한 명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기에 책 후반부의 인터뷰도 재미있게 읽었다. 나보다 더 많은 경험을 하고 각계각층의 전문가가 된 사람들의 인생철학 이야기를 듣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고 동기 부여가 되는 일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작가의 표현의 수위나 표현의 적절성이 나와 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던 것인데 그 부분을 제외하면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