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집에서 돌볼 수 있는 부모마저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기는 경우가 흔합니다. 또한 영유아를 새벽부터 저녁까지 남에게 맡기는 경우도 많습니다. 꼭 필요하지 않아도 쉽게 그렇게 합니다. (...) 서양에서는 이미 실패한 정책과 양육방식을 한국에서 도입하고 있다는 게 안타깝습니다.
<p.19>
신생아기를 비롯한 영유아기에 수술이나 입원 같은 의료 경험은 칼을 든 강도에게 유린당한 어른의 트라우마에 견줄 만큼 무섭다는 것입니다. 그때 느낀 공포와 불안 등의 감정은 아직 뇌가 다 발달하지 못한 상태에서 의식적으로 처리되지 못한 채 암묵적으로, 신체적으로 깊이 각인되어 훗날 비슷한 상황에서 공포, 무기력감, 분노 등을 촉발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것을 '유아기 의료 외상(트라우마)'이라고 합니다.
<p.60>
의학 연구에 의하면 아기 때 생성된 지방 세포의 수는 평생 줄지 않는다고 합니다. 즉, 영유아기에 과도하게 지방세포의 수를 늘리면 평생 과체중, 비만, 고혈압, 당뇨병 등의 성인병을 지니고 살 위험성이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p.73>
부부 두 사람이 서로 적응하기도 어려운데 아기가 태어난 후 부부 관계가 급속히 나빠지는 경우가 67% 정도라고 합니다. 부부와 자녀에 대해 47년간 연구한 존 가트맨 박사의 연구 결과입니다. 원인은 무엇일까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수면 부족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이가 태어난 후 첫 3년 동안 누적된 수면 부족은 부부 사이에 우울과 짜증을 높이고 대화는 줄고, 스트레스와 적대감은 올라가며 관계를 악화시키는 것이지요. 임신, 출산, 육아 때 섭섭했던 상처와 기억은 아이가 자란 다음에도 오랫동안 부부 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요인이 됩니다.
<p.84>
맥길 대학교 마이클 미니(Michael Meaney)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갓 태어난 아기 쥐를 첫 12시간 동안 어미가 얼마나 열심히 핥아주고 보살펴주는가에 따라 아기 쥐의 스트레스에 반응하는 뇌 화학물질에 영구적인 변화가 발생하며, 1천 종이 넘는 유전자의 배열도 변형된다고 합니다. (...)
물론 쥐를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를 바로 사람에게 적용하기는 어렵겠지만, 이 연구의 핵심은 유전자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요즘 학계의 뜨거운 주제인 후성유전학(epigenetics, 또는 후생유전학이라고도 함)의 주장과 일치하는 것으로, 살아가면서 경험을 통해 유전자의 발현을 활성화하거나 중단시키는 생화학적 메시지가 생성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메틸화'라고 하는데 인생의 중대 사건은 유전자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고, 메틸화 패턴은 자손에게 전달될 수 있습니다.
<p.85>
양육자가 아기의 신호에 빨리 반응하여 아기의 욕구를 바로 해소해 주고 달래주면, 아기는 스트레스 감지 및 경보 신호를 다 켜놓고 지낼 필요가 없습니다. 울음과 표정 등으로 보낸 스트레스 신호 체계에 적절하고 섬세하게 반응하는 부모에게 양육을 받으면 아기는 공포, 불안, 고통의 신호를 감지하는 두뇌의 편도체가 과도하게 각성되지 않을 것입니다. 조금만 뒤척이거나 약간만 울어도 되기 때문입니다.
강력한 신호 체계를 켜놓는 것은 상당한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인데, 이런 경우 약간만 신호를 보내도 불편이 해소되니 아이는 쉽게 달래지고 순해집니다. (...)
이와 달리 영유아기에 양육자가 아이의 신호에 반응을 적절하게 보이지 않아서 제때에 스트레스 감지 신호 체계를 끄지 못한 아이는 어떻게 될까요? 아기의 스트레스 신호를 양육자가 방치하거나, 늦게 반응하거나, 심지어 꾸짖는다면 아기는 스트레스 신호를 최대한 가동시켜야 할 것입니다. 언제 생존의 도움이 올 지, 오지 않을지 어떻게 올 지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를 교감신경계의 과활성화라고 하는데, 뇌 속 스트레스 감지기의 100촉짜리 전구를 있는 대로 다 켜놓고 있는 상태라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p.111>
"난 괜찮아" 하면서 뚱하거나 시무룩한 채로 식사 시간 내내 아무 말을 안 하는 것은 전형적인 수동 공격의 모습입니다. 감정 표현을 극도로 자제하면서 약간의 암시만으로 가족을 공포로 몰아넣는 것도 수동 공격의 모습입니다. 수동 공격도 결국 공격입니다. 단지 남이 탓하거나 법적인 처벌을 받지 못할 정도로 객관적인 수위를 낮출 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녀의 목을 조용히 조르는 것과 같은 압박감과 공포를 줄 수 있기에 독이 됩니다.
<p.224>
미국의 유명한 뇌과학자인 존 메디나 박사는 영유아의 뇌 발달에 관한 책을 쓴 뒤에 부모 교육 특강을 많이 다닙니다. 강연 후 미국의 아빠들이 자주 하는 질문이 "어떻게 키워야 우리 아이가 나중에 하버드에 갈 수 있을까요?"라고 합니다. 이에 대한 메디나 박사의 답은 간단하고 명쾌합니다. "집에 가서 아내에게 잘해주세요." 뇌과학자의 답치고는 좀 엉뚱하지 않습니까?
<p.231>
엄한 것은 아이나 어른이나 모두 지켜야 하는 규칙이나 행동 규범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 규칙과 규범을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허락된 테두리를 벗어나면 지적하고 책임을 추궁하지만, 테두리 내에서는 상당한 자율권을 보장합니다. 그래서 엄한 태도에는 아이를 존중하고 책임감과 판단력 있는 성숙한 존재로 키워주고 싶은 진정한 관심과 돌봄이 깃들어 있습니다.
반면에 억압적인 경우 아이가 지켜야 하는 규칙은 바로 어른 자체입니다. 시도 때도 없이 새로운 규칙이 생겨납니다. 충분한 예고 없이 규칙이 발표되고, 명쾌한 설명 없이 적용됩니다. 그리고 규칙을 지키지 않아도 괜찮다가 갑자기 지적을 당하기도 합니다. (...)
엄함에는 사랑과 존중, 가르침이 있습니다. 억압에는 혐오와 멸시, 가리킴만 있습니다. (...) 아이가 어릴 때는 엄하게 키우다가, 사춘기에 접어들면 허락된 행동의 범위를 넓혀가야 합니다. 사춘기는 부모로부터 독립하고 분리해 나가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p.234>
태아는 엄마와 신체적으로 연결되어 성장하며, 갓난아기는 부모와 거의 밀착해서 손 안에서 연결되어 키워지며, 좀 더 자라면 부모의 시선 안에서 눈빛으로 연결되어 자랍니다. 그러다가 물리적 시선에서는 벗어나더라도 정신적 시선으로 연결되어 살아가야 행복합니다.
<p.240>
아이는 부모의 마음속에 살고, 부모의 의식 안에 존재의 자리가 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후라도 '어머니'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는데, 이것은 어머니 안에 자기가 어떤 모습으로 있었는가 하는 이미지와 일맥상통합니다. 부모의 시선 안에서 자신이 사랑스럽고 대견한 딸이나 아들로 존재한다면, 부모님이 살아계시든, 돌아가셨든 흔들리지 않는 자기 정체성을 지닐 수 있습니다.
<p.245>
아무리 부모가 자녀를 사랑한다고 해도 자녀가 살면서 겪을지 모르는 모든 트라우마를 전부 다 막아줄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외상성 사건을 겪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통해 성장할 수 있도록 회복탄력성을 키워주는 것입니다.
<p.247>
대부분의 우리나라 남성들은 학창 시절부터 성인이 되어서까지 계속 관심을 갖고 준비하는 것이 무슨 직업을 갖고 어떻게 돈을 벌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어떤 남편이 될지, 어떤 아버지가 될지, 어떤 노년기를 맞을지에 대해서는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어떻게 좋은 남편이 되고 좋은 아버지가 될지 그려지는 모습이 없으며, 방법을 모를 수 있습니다. 자기가 아는 방법이 오히려 역효과를 내기도 합니다. 그렇다 보니 우리나라의 많은 아버지들이 아버지의 역할은 밖에서 열심히 돈 벌고 사회 활동을 하는 것이라 믿고, 육아법에 대해서는 '아부지'가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p.251>
'아버지는 세상에 견주어 자식을 보고, 어머니는 내 자식에 견주어 세상을 본다.'
<p.255>
이처럼 행동을 수정하는 방법은 행동코칭입니다. 온통 행동에 대한 지시입니다. 상대방의 생각과 감정은 무시하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일방적으로 요구합니다. 아이 입장에서 무시를 당했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아무리 금전적으로 부유한 부모라도 자녀를 무시하면 자녀는 정서적 흙수저가 됩니다.
올바른 행동을 가르쳐주기 위해 효과적으로 개입하는 방법이 감정코칭입니다. 감정코칭의 핵심은 매우 간단합니다. '감정은 수용하되 행동은 수정한다.' 즉, 지도를 하기 전에 감정과 인격에 대한 지지를 해주는 것입니다. 지지가 없는 지도는 남을 무시하는 지시일 뿐입니다.
<p.264>
여유는 생기는 게 아닙니다. 경제적 여유가 생기고 정신적 여유가 생기고, 시간적 여유가 생긴 후에 아이들을 돌보겠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여유는 선택하고 만드는 것입니다.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우선순위의 맨 위에 두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p.288>
나는 지금 3살이 된 우현이를 키우면서 그런 생각이 든다. '지금 조금 편하려다 나중에 진짜 힘들어질 수도 있다.' 이 생각은 이 책을 포함한 몇몇 육아 서적을 읽다가 자연스레 들었는데, 사실 이 말은 인생 전반에 걸쳐 흔히 들어봤던 말이면서도 왠지 모르게 입을 삐죽하며 한 귀로 흘려버리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육아에 있어서는 이 말을 흘려버릴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지금 조금 편한 건 나의 삶이고 나중에 진짜 힘들어지는 건 아이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힘들어진 아이의 삶으로 내 삶도 힘들어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만 3년. 많은 전문가들이 애착 형성을 위해 중요한 시기로 보는 기간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부모에게는 가장 힘든 시간이다. 처음 1년은 잠을 못 자 힘들고, 다음 1년은 밥 먹이느라 힘들고, 마지막 1년은 아이와 '돼, 안 돼'로 실랑이를 하느라 힘든 시기다. 난생 처음 해보는 부모 노릇에 시간과 정성을 쏟다 보면 어느새 인생에서 '나'는 잊히고 '엄마'와 '아빠'만 남게 된다. 아이가 태어나기 직전까지 자유로웠던 지난 30년 간의 삶이 아이가 태어난 후 180도 달라지게 되고, 달라진 현실은 더욱 답답하게만 느껴진다. 그래서 많은 부모들이 그때의 자유를 갈망한다. 여유롭게 즐겼던 둘 만의 데이트, 비행기 타고 떠나는 해외여행, 줄 서서 기다린 끝에 먹게 되는 맛집의 음식 등 제각기 원하는 바는 다르겠지만 지금의 속박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다들 같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많은 부모가 지금의 나를 편하게 하는 삶을 선택한다. 가정 보육의 여유가 있음에도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위해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거나 하루 종일 나만 바라보는 아이의 눈을 돌려 TV나 핸드폰을 바라보도록 한다. 부모도 사람이기에 잠시라도 육아로부터 숨 돌릴 틈은 있어야 하지만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정도의 차이이다. 그리고 그 정도를 정하는 데 많은 사람들이 고려하는 기준은 '남들은 어떻게 하는지'이다. 그러나 이는 결코 바람직한 기준이 아니다. 특히 서문에서 언급된 것처럼 '서양에서는 이미 실패한 정책과 양육방식을 도입'한 한국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부부 간에 합의된 양육관 없이 '남들 하는 대로' 키우면 당장은 편할 것이다. 주말이면 친구들과 술 마시고 게임하고, 아이 어린이집 보낸 시간에 예전처럼 소파에 누워서 TV도 보고, 그간 못 다닌 맛집도 핸드폰과 유튜브만 있으면 예전처럼 다닐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잠깐의 편함을 누리는 사이에 만 3년이라는 중요한 시기를 지나고 있는 아이에게 큰 애착 손상을 줄 수 있다. 그리고 이때의 애착 손상은 당장 눈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에 그 중요성을 간과하기 쉽지만 청소년기가 되고 성년기가 되었을 때 특정 문제로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만약 다 큰 아이에게 정신적 혹은 성격적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건 갓난아이와의 시간에서 받게 되는 피로감과는 차원이 다른 고통이 될 것이다. 나는 이런 점 때문에 지금 조금 편하려다 나중에 진짜 힘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 다른 말로 하자면 나중에 편하기 위해 지금의 불편함을 참고 견디는 것이다.
육아에는 정답이 없다고들 하지만 부부가 머리를 맞대고 지속적으로 육아에 대해 고민하면 오답은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아이의 인생을 오답으로부터 멀리 돌아가게 하면 훗날 아이가 커서 자기 인생에 대한 정답을 스스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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