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극한의 상황에서도 농담을 할 여지만 발견할 수 있으면 이미 그건 극한 상황이 아니다.
<p.31>
벌거벗은 자가 부끄러워하지 않을 때는 구경꾼이라도 시선을 돌려야지 어쩌겠는가.
<p.57>
나는 그때까지도 연필 끝으로 종이를 찢어 내는 버릇을 못 고치고 있었다. 선희는 내가 그 짓을 하고 있는 것만 보면 그림을 그리고 있다가도 다가와서 뒤로부터 팔을 잡으며 못 하게 했다. 선희 말인즉, 그 짓을 하고 있을 때는 내 신경줄이 올올이 밖으로 노출돼 보인다는 거였다. 신경줄이 어떻게 생겼길래 그 애 눈엔 보이는 걸까. "제발 그만 둬. 신경줄은 숨어 있어야 돼. 중요한 거니까."
<p.268>
아무튼 우리는 만났다 하면, 한시를 아끼며 즐거워하려고 기를 썼다. 그러다 녹초가 되면 지섭은 슬그머니 부산을 다녀오마고 하면서 사라졌다. 지섭에게뿐 아니라 나에게도 부산은 꼭 필요한 여백이었다.
<p.281>
그는 좋아하는 사람하고 같이 있는 동안은 최선을 다해 자기 존재로 상대방을 완벽하게 채우려는 타입이었다. 딴 생각을 하는 걸 참지 못했고 그럴 새도 주지 않았다. 그가 부산으로 가고 나면 볼일을 보러 갔단 생각보다는 아, 쉬러 갔구나 싶을 정도로 그는 누구를 좋아하는 일에 미련하도록 자신을 혹사했다.
<p.285>
작가가 보낸 유년 시절이란 그야말로 가공되지 않은 원료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아름다운 보다 중요한 이유는, 작가의 남다른 심미적 가치와 감수성에 포착된 것이기 때문이다.
- 이남호 (문학평론가)
<p.311>
이 책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후속작으로 박완서 작가가 스무 살 성년이 되어 겪은 한국 전쟁의 시작부터 미군 PX에서 일하게 되기까지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 자전소설이다. 전작의 내용이 이어지므로 더 재미있게 읽고 싶다면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먼저 읽은 다음에 이 책을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이 책의 제목인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책의 서문에 나오듯 자주 오르내리고 했던 동네의 뒷산이 개발로 인해 사라지게 되면서 어색하고 쓸쓸해진 마음이 시간이 지나며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는지, 아니면 내 기억 속에만 있었던 것인지, 어느새 산의 부재에 익숙해져 버린 작가의 마음에서 나온 말이다. 나는 이 책의 제목에 담긴 의미를 알게 되었을 때 이 책의 제목이 좋아졌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의 삶에도 그 산이 있고 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내 기억 속에 자리 잡은 그 산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작가의 유년시절은 그 세대의 경험이 전무한 내게는 너무나도 특별하고 신기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동 세대의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특별한 경험이 아닐 수도 있다. 마치 나와 비슷한 세대의 사람들이 초등학생이었을 때는 2002년 월드컵과 붉은 악마가 열풍이었고, 고등학생 때는 누구나 검은색 노스페이스 패딩 점퍼를 입고 다녔던 것에 대해 그다지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다 겪어본 일 가지고 무슨 소설을 써?'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이남호 문학평론가의 말처럼 작가가 남다른 심미적 가치와 감수성의 눈을 가지고 그 시절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있는 유년 시절이 특별한 유년 시절로 바뀌는 순간이다. 작가의 일상에 배경처럼 존재하던 그 산이 작가를 통해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된 것처럼 우리의 평범한 일상과 기억도 기록하고 의미를 부여해야 우리에게 특별한 것으로 오랫동안 남아있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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