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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 없는 남자들 > 무라카미 하루키, 2014

by Ditmars 2021. 2. 27.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2014

 

 끝까지 아무것도 몰랐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아는 것이 모르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 그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이자 삶의 자세였다. 설령 아무리 극심한 고통이 닥친다 해도 나는 그것을 알아야 한다. 아는 것을 통해서만 인간은 강해질 수 있으니까.

<p.28>

 

 가후쿠가 보기에, 세상에는 크게 두 종류의 술꾼이 있다. 하나는 자신에게 뭔가를 보태기 위해 술을 마셔야 하는 사람들이고, 또 하나는 자신에게서 뭔가를 지우기 위해 술을 마셔야 하는 사람들이다.

<p.44>

 

 "하지만 아무리 잘 안다고 생각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타인의 마음을 속속들이 들여다본다는 건 불가능한 얘깁니다. 그런 걸 바란다면 자기만 더 괴로워질 뿐이겠죠. 하지만 나 자신의 마음이라면,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분명하게 들여다 보일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나 자신의 마음과 솔직하게 타협하는 것 아닐까요? 진정으로 타인을 들여다보고 싶다면 나 자신을 깊숙이 정면으로 응시하는 수밖에 없어요.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p.51>

 

 스무 살 전후의 나날, 나는 일기를 쓰려고 몇 번 노력해봤지만 영 잘되지 않았다. 당시 내 주위에는 너무 많은 일들이 쉴 새 없이 일어났고, 그걸 따라잡기에도 벅찼다. 도저히 날마다 멈춰 서서 그날 일어난 일들을 일일이 노트에 적어둘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이건 꼭 적어둬야지' 하고 생각할 만한 사건도 아니었다. 나로서는 거센 맞바람 속에서 가까스로 눈을 뜨고, 호흡을 가다듬고,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게 고작이었다.

<p.111>

 

 "재치라고 하니 말인데, 프랑수아 트뤼포의 옛날 영화에 이런 장면이 있어요. 여자가 남자에게 말합니다. '세상에는 예의 바른 사람과 재치 있는 사람이 있어. 물론 둘 다 훌륭한 자질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예의보다 재치가 이기지.' 이 영화 본 적 있어요?"

 "아뇨, 없는 것 같군요."

 "여자가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는데요. 이를테면 어떤 남자가 문을 열었는데 안에서 여자가 알몸으로 옷을 갈아입는 중이에요. 그때 '실례했습니다, 마담'이라고 말하고 얼른 문을 닫는 게 예의 바른 사람입니다. 반면 '실례했습니다, 무슈'라고 말하고 얼른 문을 닫는 게 재치 있는 사람이죠."

<p.131>

 

 "사생활에도 불만이 없어요. 친구도 많고, 몸도 아직 별 탈 없이 건강해요. 나름대로 내 생활을 즐기고 있지요. 하지만 나는 대체 무엇인가, 요즘 들어 자꾸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것도 상당히 진지하게 말이죠. 내게서 성형외과 의사의 능력이나 경력을 걷어낸다면, 지금 누리고 있는 쾌적한 생활환경을 잃는다면, 그리고 아무 설명도 없이 한낱 맨몸뚱이 인간으로 세상에 툭 내던져진다면, 그때 나는 대체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p.146>

 

 "인생이란 묘한 거야. 한 때는 엄청나게 찬란하고 절대적으로 여겨지던 것이, 그걸 얻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내버려도 좋다고 생각했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 혹은 바라보는 각도를 약간 달리하면 놀랄 만큼 빛이 바래 보이는 거야. 내 눈이 대체 뭘 보고 있었나 싶어서 어이가 없어져."

<p.211>

 

 인간이 품는 감정 중 질투심과 자존심만큼 골치 아픈 것도 아마 없을 것이다.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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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1927년 출간된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Men Without Women)>과 제목이 같은데 실제로 무라카미 하루키가 해당 작품의 영향을 받아 출간한 단편집이라고 한다. 기존에 발표한 단편 5편(드라이브 마이 카, 예스터데이, 독립기관, 셰에라자드, 기노)에 이번 출간을 위해 발표한 '여자 없는 남자들', 그리고 해외 번역본에 추가된 '사랑하는 잠자'까지 총 7편의 단편 소설을 엮은 책이다.

 

 나는 평소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즐겨 읽었다. 그래서 여태까지 읽은 작품들을 따져보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의 대부분을 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 찾아보니 그가 낸 작품이 워낙 많아서인지 내가 읽은 건 그중 적은 수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나 보다. 누군가 내게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은 어때, 하고 물어본다면 나는 그의 작품은 어딘가 기묘한 구석이 있는 느낌이 들어, 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대부분의 소설에 99%의 현실과 1%의 비현실이 섞여 있어서인지 읽으면서도 몽환적인 느낌을 받는다. 또한 대개 주인공은 남자이고 주인공이 현실에서 고통을 겪거나 극복하는 과정에서 여자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의 작품에서 여자와의 정사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부분 중 하나이다. 주인공들은 때로는 현실의 고통을 극복하기도 하지만 보통 체념하고 받아들이게 되는데 이런 줄거리와 결말에서 나는 뭐랄까 맥 빠지는 느낌과 나른함을 느끼기도 했다. 정확히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일본 소설과는 확연히 다른 무언가가 있다. 그걸 재미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 작품은 제목처럼 연인이나 배우자로서의 여자가 자신의 삶에서 사라지게 된 남자의 이야기들이다. 특유의 몽환적이고 기묘한 분위기가 있긴 하지만 여자와 남자의 관계에 대해서는 현실적으로 묘사를 한다. 하나의 단편이 비교적 짧은 편인 데다가 이야기가 빠르게 전개되어 읽기가 쉽다. 나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소설 속 주인공의 삶과 생각을 엿보면서 내 삶의 방향과 가치관을 미세하게 수정해 나가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들이 하는 멋진 생각과 멋진 태도를 동경하며 나도 저런 상황에서 저렇게 해봐야지,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여자 있는 남자가 <여자 없는 남자들>을 읽으면서 여자와 남자 사이의 미묘한 인간관계 속 느끼게 된 점들이 많아서 좋았던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