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어린이라는 세계 > 김소영, 2020

by Ditmars 2021. 3. 17.

<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2020

 

 어린이에게 '착하다'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착한 마음을 가지고 살기에 세상이 거칠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착하다는 말이 약하다는 말처럼 들릴 때가 많아서이기도 하다. 더 큰 이유는 어린이들이 '착한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 두려워서다. 착하다는 게 대체 뭘까? 사전에는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고 설명되어 있지만, 실제로도 그런 뜻으로 쓰이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보다는 어른들의 말과 뜻을 거스르지 않는 어린이에게 착하다고 할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그러니 어린이에게 착하다고 하는 건 너무 위계적인 표현 아닌가.

<p.32>

 

 어딘가 좀 할머니 같은 말이지만, 나는 어린이들이 좋은 대접을 받아봐야 계속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안하무인으로 굴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내 경험으로 볼 때 정중한 대접을 받는 어린이는 점잖게 행동한다. 또 그런 어린이라면 더욱 정중한 대접을 받게 된다. 어린이가 이런데 익숙해진다면 점잖음과 정중함을 관계의 기본적인 태도와 양식으로 여길 것이다. 점잖게 행동하고, 남에게 정중하게 대하는 것. 그래서 부당한 대접을 받았을 때는 '이상하다'고 느꼈으면 좋겠다. 사실 내가 진짜 바라는 것은 그것이다.

<p.41>

 

 아무리 어린 사람이라도 악몽은 자기 힘으로 이겨내야한다. 그 사실을 생각하면 모든 어린이가 안쓰럽기도 하고, 새삼 대단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또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런 무서운 것들이 어린이의 어떤 면을 자라게 한다는 것을. 무서운 것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조심하고, 무서운 것을 마주하면서 용기를 키우고, 무서운 것을 이겨 내면서 새로운 자신이 된다는 것을. 그런 식의 성장은 우리가 어른이 된 뒤에도 계속된다. 그러니 어른들이 어린이에게 해 줄 일은 무서운 대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마주할 힘을 키워 주는 것 아닐까.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을 응원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다독이면서.

<p.53>

 

 피아노 학원에 등록한 것은 글을 쓰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쓰고 보니 마치 내가 피아노에 대한 글을 쓰려던 것 같은데, 언젠가 그런 날이 오면 좋겠지만 일단 그건 아니다. 그때 나는 <말하기 독서법> 원고의 개요를 잡고 작업 일정을 세운 참이었다. 독서교실 수업과 글쓰기를 나란히 하려니 '아이고, 당분간 큰일 났구나' 싶었다. 시간도 에너지도 넉넉하게 필요했다. 그중 시간은 차라리 어떻게 해볼 여지가 있었다. 엄청난 결단이 필요하지만, 노는 시간을 줄이고 규칙적으로 자고 일어나면 될 것 같았다. 문제는 에너지, 생산적인 힘이었다. 글을 쓰다 막힐 때나 쓰기에 지쳤을 때 어떻게 창의성과 집중력을 유지할까.

 나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새로운 것을 배워보기로 한 것이다. 일이나 글쓰기 말고 완전히 몰두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생활에 활력을 주는 것, 지금껏 배워 보지 못한 것, 읽고 쓰는 일과 전혀 관련이 없는 것, 피아노였다.

<p.130>

 

 이런 상황에서 어린이는 대상화된다. 어른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어린이를 사랑한다고 해서 꼭 어린이를 존중한다고 할 수는 없다. 어른이 어린이를 존중하지 않으면서 자기중심적으로 사랑을 표현할 때, 오히려 사랑은 칼이 되어 어린이를 해치고 방패가 되어 어른을 합리화한다. 좋아해서 그러는 걸 가지고 내가 너무 야박하게 말하는 것 같다면, '좋아해서 괴롭힌다'는 변명이 얼마나 많은 폐단을 불러왔는지 생각해보면 좋겠다. 어린이를 감상하지 말라. 어린이는 어른을 즐겁게 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어른의 큰 오해다.

<p.227>

 

 어린이는 정치적인 존재다. 어린이와 정치를 연결하는게 불편하다면, 아마 정치가 어린이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른 보기에도 민망하고 화가 나는 장면들을 어린이들에게 보이기 싫은 것이다. 그런 문제일수록 어린이에게 설명하기도 어렵다.

<p.236>

 

 "제가 옛날에는 그래도 잘 그렸던 것 같은데요, 그 때는 뭐 그릴까 생각 안 하고 그려도 잘했거든요. 지금은 생각을 해서 그런지 더 안돼요."

 나는 지원이에게 말했다. 그건 그림을 더 잘 그리게 되느라 그러는 거라고. 무엇이든 하면 할수록 다음에 더 잘할 방법을 찾게 된다고.

 "아무 고민 없이 할 때보다 고민을 할 때가 더 힘들기 때문에 못 그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야. 그런데 생각해봐, 어느 쪽이 더 잘 그리겠어? 그러니까 이럴 땐 괴로운 게 더 좋은 거지."

<p.250>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돼. 글은 자기만을 위해서 쓸 수도 있어. 그러면 내 생각을 내가 읽을 수 있거든."

<p.251>

 

 어린이가 가르쳐주어서 길을 아는 게 아니라 어린이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지 고심하면서 우리가 갈 길이 정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이를 가르치고 키우는 일, 즉 교육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몫이 된다.

<p.254>

 

 나는 교육의 실패를 선언하고 싶다면 세상의 실패를 선언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냉소주의자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절망적인 소식들이 쏟아질 때면 자연히 포기하는 쪽으로 몸과 마음이 기운다. 분노와 무력감 사이를 오가다 보면 이 나라를 외면하고 싶어 진다. 하지만 내가 버리는 짐을 결국 어린이가 떠안을 것이다. 나는 조그마한 좋은 것이라도 꼼꼼하게 챙겨서 어린이에게 주고 싶다. 거기까지가 내 일이다. 그러면 어린이가 자라면서 모양이 잘못 잡힌 부분을 고칠 것이다.

<p.255>

 

더보기

 이 책의 작가는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 출판사에서 어린이책 편집자로 10년 넘게 일하다 지금은 독서교실에서 어린이들과 책을 읽는 사람이다. 이런 기본 정보에 내가 책을 읽고 작가에 대해 느낀 점을 덧붙이자면 작가는 마음이 따뜻하고 공정한 사람인 것 같다. 마음이 따뜻하다는 것은 어린이를 포함하여 사회적 약자에 대해 그녀가 갖는 사려 깊은 생각에서 알 수 있었고, 공정하다는 것은 그들을 나와 동등한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는 모습에서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왜인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무조건적으로 그들의 어려움을 없애주고 그들의 일을 돕는 것이라는 생각을 은연중 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자연스레 사회적 약자를 나와 다른, 혹은 나보다 못한 인격체로 받아들일 가능성을 갖게 한다. 이 책에서 작가가 어린이를 존중하는 모습과 태도를 보면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진정한 배려가 어떠한 것인지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내가 지금까지 어린이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인간관계에 어린이는 아무도 없었고, 혹시 있다 하더라도 어린이를 인간관계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린이는 부모의 자녀로서, 보호자의 보호를 받아야 하고 어른이 되기 위해 거치는 불완전 존재로서 내게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린이의 말과 행동과 생각에 대해 항상 '부족하고, 이해해줘야한다는' 전제를 가졌다. 이런 전제를 가진 내가 어린이를 대할 때면 대개 그 모습이 어린이에 대한 배려로 나타났지만 가끔은 어린이에 대한 무시로 나타난 적도 있었을 것이다. 언젠가 또 어린이와 만나서 대화할 일이 생긴다면 이 책의 내용을 꼭 기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