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은 가능한 한 태양이 일 회전하는 동안이나 이를 과히 초과하지 않는 시간 안에 사건의 결말을 지으려는 경향이 있다."
- 아리스토텔레스
<p.24>
독서는 왜 하는가? 세상에는 많은 답이 나와 있습니다. 저 역시 여러 이유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독서는 우리 내면에서 자라나는 오만(휴브리스)과의 투쟁일 것입니다. 저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을 읽으며 '모르면서도 알고 있다고 믿는 오만'과 '우리가 고대로부터 매우 발전했다고 믿는 자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독서는 우리가 굳건하게 믿고 있는 것들을 흔들게 됩니다. 독자라는 존재는 독서라는 위험한 행위를 통해 스스로 제 믿음을 흔들고자 하는 이들입니다. 비평가 해럴드 블룸은 <교양인의 책 읽기>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독서는 자아를 분열시킨다. 즉 자아의 상당 부분이 독서와 함께 산산이 흩어진다. 이는 결코 슬퍼할 일이 아니다."
<p.29>
그 후로도 저는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독서를 통해 셀 수 없이 많은 인물을 만나고, 세계의 거의 모든 도시를 여행했으며, 평생 한 번도 겪어볼 일이 없는 사건들에 연루되었습니다. 그 기억과 경험은 고스란히 제 안에 남아 있고 그 세계는 제가 직접 경험한 현실보다 훨씬 더 크고 풍부합니다. 이 세계가 모두 가짜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책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고 저라는 인간의 정신 안에서 고유한 방식으로 유일무이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환상에 빠져 현실을 잘못 보아서는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환상이고, 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현실일까요? 인간이 그것을 분명히 구분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현실에 너무 집착해 자기 내면의 정신적 현실을 무시하는 것이 문제는 아닐까요?
<p.66>
플로베르는 분명히 말했습니다. '거의 아무런 주제도 없는 아니 적어도 주제가 거의 눈에 뜨이지 않는' 책을 쓰겠다고요. 중심부는 그 무엇이라도 좋은 것입니다. 플로베르는 중심부가 아니라 독자가 중심부에 다다르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만약 플로베르에게서 현대소설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바로 이 때문일 겁니다. 그는 주제와 교훈을 강조하는 소설들을 낡은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p.99>
그렇다면 우리가 소설을 읽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헤매기 위해서일 겁니다. 분명한 목표라는 게 실은 아무 의미도 없는 이상한 세계에서 어슬렁거리기 위해서입니다. 소설은 섬세하게 설계된 정신의 미로입니다. 그것은 성으로 향하는 K의 여정과 닮았습니다. 저 멀리 어슴푸레 보이는 성을 향해 길을 따라 걸어가지만 우리는 쉽게 그 성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대신 낯선 인물들을 만나고 어이없는 일을 겪습니다. 일상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정들을 경험하기도 하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문제를 곰곰이 짚어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서점 서가에 꽂힌 그 수많은 책들 중에서 우리가 굳이 소설을 집어 드는 이유는, 고속도로로 달리는 것에 싫증이 난 운전자가 일부러 작은 지방도로로 접어드는 이유와 비슷합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의 이성은 줄거리를 예측하고, 작가의 의도를 가늠하고, 인물의 성격을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의 누군가와 비교하기도 합니다. 반면 우리의 감성은 작가가 써놓은 적확하고 아름다운 문장에 탄복하기도 하고, 예리한 인물 묘사에 공감하기도 하고, 주인공이 처한 고난에 가슴 아파하기도 합니다. 이성과 감성이 적절히 균형을 이룰 때, 우리의 독서는 만족스러운 경험이 됩니다. 때로 이성에 이끌렸다가 때로 감성에 이끌렸다가 하면서 우리의 정신은 책 속에 구현된 그 이상한 세계를 점차 이해해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세계의 일원이 됩니다.
<p.102>
저는 인간의 내면이란 크레페 케이크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상이라는 무미건조한 세계 위에 독서와 같은 정신적 경험들이 차곡차곡 겹을 이루며 쌓이면서 개개인마다 고유한 내면을 만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p.104>
어떤 책들은 독자와 힘겨루기를 합니다. 그 책들을 읽고 나면 독자의 자아는 읽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기 어렵습니다. 이전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인물과 생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런 인물과 사상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는 (아니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p.138>
(...) "그리고 깨닫게 될 것이다.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 평론가 신형철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에 대해 말했던 것의 일부
<p.154>
소설은 독자로 하여금, "너는 괴물이다. 반성하라!"고 직설적으로 외치지 않고, 괴물의 내면을 이야기라는 당의정으로 감싸 흥미롭고 설득력 있게 보여줌으로써 독자가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가지 시각으로 괴물을 직시하도록 만들어줍니다. 우리는 라스콜니코프도, 토니 소프라노도, 험버트 험버트도, <파리대왕>의 소년들도 아닙니다. 대체로 우리는 그렇게까지 심각한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내면에 그런 면이 전혀 없다고는 아무도 단언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고대 그리스인이 믿은 바와 같이, 인간의 성격은 오직 시련을 통해 드러나는데, 우리는 아직 충분한 시련을 겪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언제나 잘 모르고 있습니다. 소설이 우리 자신의 비밀에 대해 알려주는 유일한 가능성은 아닐 겁니다. 그러나 그중 하나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이상한 것임에도 분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새로운 괴물을 만나기 위해 책장을 펼칩니다.
<p.176>
"나는 책이 많이 있는 어떤 방으로 가서 그중 한 권도 손을 대지 않고 그저 바라보기만 한답니다. 그러면 무어라고 설명하기 힘든 무언가를 받게 되요. 그것은 어떤 강한 흥미라고도 할 수 있고, 어떤 안도감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 움베르코 에코와 대담을 하던 장클로드 카리에르가 한 말 중 일부
<p.182>
이 책에서 작가는 책을 좋아하는 한 명의 독자의 입장에서 독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한다.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독서는 이런 것이다'라고 알려주는 것이 아닌, 마치 독서 모임에서 회원 중 한 명이 '저는 독서가 이래서 좋아요'라고 소소하게 이야기하는 듯하다. 그래서 읽는 데에 부담이 없다. 다만 작가의 오랜 독서 경험과 그에 걸맞은 필력으로 인해 생각의 수준이 높고 문장이 잘 정제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는 독서 모임의 비범한 회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사람들에게 독서가 왜 좋은지, 독서를 왜 하는지 물어보면 대답은 평범할 것이다. 특히 이 책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문학의 경우에는 말이다.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서가 왜 재미있느냐고 묻는 순간 대답이 약간 곤란해짐을 느낀다. 흔히 하는 말로 '재미있는 데에는 이유가 없다'고 쉽게 말하고 끝낼 수도 있겠지만, 아마 구체적으로 독서의 어떤 점에서 우리가 재미를 느끼는지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독자가 생각하지 않는 이 부분에 대해 작가는 깊이 고찰하고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그 설명은 매우 명쾌하여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많은 공감을 할 수 있었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나는 수능을 마치고 대학 입학을 앞둔 고3 겨울방학에 일본 소설에 흠뻑 빠져있었다. 그 시작은 아마 오쿠다 히데오나 히가시노 게이고 같은 유명한 작가의 베스트셀러 서적이었을텐데, 그 기간 동안 나는 집 근처 시립 도서관의 일본 소설 서가에 꽂혀 있는 대부분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이 블로그에서처럼 책에서 마음에 드는 문장이 나오면 표시해두었다가 책을 다 읽으면 따로 노트에 적곤 했다. 마음에 드는 문장의 대부분은 등장인물의 대화 속에 은연중 드러나는 삶의 태도나 좋은 비유 등이었는데 예컨대, "다이는 자신의 가장 나약한 부분을 우리 앞에서 말할 수 있잖아. 강하다는 건, 사실 그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같은 문장이었다. 일본 소설은 내가 느끼기에 인물에 대한 묘사가 자세하여 소설 속 세계로의 감정 이입이 쉽고, 어느 줄거리가 되었든 자신에 대해 또는 삶에 대해 생각해 볼 말들을 던져준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때 읽은 소설의 제목을 봐도 내가 이 책을 읽었는지 기억도 안 나고, 심지어 처음 보는 책인가 싶어 재밌게 읽다 보면 예전에 읽었던 책이라는 것을 깨닫기도 한다. 그만큼 머릿속에서 많이 지워졌다. 한 때는 이러한 사실에 허무한 마음이 들어, 소설은 읽어도 그때만 재미있을 뿐 시간이 지나면 잊히고 내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것인가 싶었다. 그래도 그때 내가 나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했던 생각이 '그때 노트에 적은 수많은 인상 깊은 구절들, 그때 느낀 감성들이 내 어딘가에 쌓여 조금씩 내 인생의 항로를 바꿔왔을 것이다'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나의 이런 생각을 작가는 '저는 인간의 내면이란 크레페 케이크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상이라는 무미건조한 세계 위에 독서와 같은 정신적 경험들이 차곡차곡 겹을 이루며 쌓이면서 개개인마다 고유한 내면을 만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이라는 멋진 말로로 표현한 것이다. 작가의 찰진 비유와 명료한 문장으로 희미하게 가지고 있던 내 개인적인 경험과 생각이 뚜렷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구나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말이나 글로 윤곽을 가지고 표현되기 전까지는 실체가 희미하고 또 금방 사라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말과 글로 표현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분명 이것들은 내 생각과 내 감정인데도 정확하게 표현하기가 참 어렵다. 오히려 날 알지도 못하는 다른 사람이 그것을 더 잘 표현할 때도 있다. 책이 그렇다. 작가가 좋은 문장과 단어로 내 생각과 감정에 이름을 붙여주는 순간, 내 것이지만 나도 잘 몰랐던 그것들의 실체를 제대로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때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조금 더 알 수 있게 된다. 이건 참으로 멋진 일이 아닐까.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보통의 언어들 > 김이나, 2020 (0) | 2021.04.12 |
---|---|
<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 이도우, 2018 (0) | 2021.04.01 |
< 오늘부터 훈육을 그만둡니다 > 주부의 벗(엮음), 2019 (0) | 2021.03.20 |
< 어린이라는 세계 > 김소영, 2020 (0) | 2021.03.17 |
< 아파트에서 살아남기 > 김효한, 2013 (0) | 2021.03.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