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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 이도우, 2018

by Ditmars 2021. 4. 1.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이도우, 2018

 

 가끔 생각한다. 열 권의 책을 한 번씩 읽는 것보다, 때로는 한 권의 책을 열 번 읽는 편이 더 많은 걸 얻게 한다고.

<p.63>

 

 "사람이 아프면 옆에서 돌봐주고 좀 기대기도 하고... 그러는 거 아닌가. 서로 의지하는 거잖아. 솔직히 우리 이모, 곁을 안 주려고 할 때가 있어서 서운하긴 해."

 은섭은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대체로 두 가지 태도인 것 같아. 아플 때 위로받고 싶고, 챙겨주면 고마워하는 사람. 반면, 아플수록 동굴에 숨어서 혼자 앓는 사람. 자신을 찾는 것도 싫고 들여다보지도 못하게 하는 사람."

 해원이 그런 은섭을 바라보자 그는 부드럽게 웃었다.

 "이모님은 두 번째 같은 사람이 아닐까?"

<p.152>

 

 책들을 기획하고 쓰고, 그리고, 사진 찍어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정성 들여 제작했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다 소중해 보인다. 진심이나 진정성만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면 세상에 좌절할 일이 없겠지.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렇지 않으니 결국은 추릴 수밖에 없다. 모두 최선을 다하고 결과에 기뻐하거나 실망하거나,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나도 마찬가지.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까지 독립출판을 시작하는 게 현명한지 모르겠지만, 하고 싶은 건 해야 하는 거고, 실제로 해보지 않으면 그걸 했을 때의 인생을 영영 모르게 될 테니까.

<p.253>

 

 "나 한때 은근히 철도 마니아였는데."

 조수석에서 해원이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그녀는 벨트가 달린 올리브색 코트 아래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바람 쐬고 싶으면 그림 도구를 챙겨서 기차를 타곤 했었어. 식당 칸이나 카페 칸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왠지 기분이 좋아졌거든. 지금은 식당 칸이 없어져서 아쉽지만."

 "관광열차에는 아직도 있을걸? 나도 철도 여행 좋아했어. 한때는 기차에서 먹고 자면서 몇 년 살아도 상관없겠다 싶었고. 기차가 있는 풍경은 그 주변까지 이유 없이 아름다워 보였으니까."

<p.261>

 

 "근데 시간이 지나다 보면 서로 얼굴을 못 보니까... 노인들이 오해도 되고 노여움도 많아지고 그래요. 주변 늙은이들을 봐도 그렇고, 외로워도 외롭다는 말은 못하고 화를 내더라구. 부끄럽네요."

<p.267>

 

 인생은 길지 않고 미리 애쓰지 않아도 어차피 우리는 떠나. 그러니 그때까지는 부디 행복하기를.

<p.278>

 

 "미워서 답장 안 했던 거 아니야. 그냥 인정하기 싫었어. 금이 가버린 소중했던 것을... 접착제로 붙여서 다시 두고 싶지 않았어. 좋았던 추억만 간직하자고 결심했었으니까."

 "그게 너의 오만이야. 금이 가면 어때? 테이프로 좀 붙이면 어때? 전처럼 완벽하진 않겠지만 흠이 생겼어도 곁에 둘 수 있잖아. 아니, 다 깨져버렸다 해도 붙일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러면 안 되는 거야? 늘 흠 없는 우정이어야 해? 그런 게 세상에 있기나 해? 나는 너한테 원 스크라이크에 아웃된 느낌이었다고."

<p.308>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지나간 사랑들을 떠올려보면... 사랑하는 내 모습을 사랑했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래요, 인정하자면 저는 짝사랑을 하고 있을 때가 참 좋았고, 그래서 이 이야기가 와닿았거든요."

<p.341>

 

 좀처럼 행복할 수 없는 인간들이 가장 손쉽게 자기 인생을 합리화 하는 방법. 가까이 있는 누군가를 집요히 미워하고 질투하고 원망하는 것... 어쩌면 자신도 그렇게 변해가는 게 아닐까 해원은 두려워졌다.

<p.375>

 

 오랫동안 기록을 계속하다 보면 오늘 날짜의 부피가 생긴다. 6년 전 오늘. 3년 전 오늘. 작년과 올해의 오늘. 겹겹이 층이 쌓이는 페이스트리 빵처럼 그 속에 기억과 장면들이 깃든다.

<p.387>

 

 한때는 살아가는 일이 자리를 찾는 과정이라고 여긴 적이 있었다. 평화롭게 안착할 세상의 어느 한 지점. 내가 단추라면 딸깍 하고 끼워질 제자리를 찾고 싶었다. 내가 존재해도 괜찮은, 누구도 방해하지 않고 방해도 받지 않는, 어쩌면 거부당하지 않을 곳. 그걸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어디든 내가 머무는 곳이 내 자리라는 것. 내가 나 자신으로 살아간다면 스스로가 하나의 공간과 위치가 된다는 것. 내가 존재하는 곳이 바로 제자리라고 여기게 되었다. 가끔은, 그 마음이 흔들리곤 하지만.

<p.388>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인생의 고통이 책을 읽는다고, 누군가에게 위로받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것들이 다 소용없는 건 아닐 거라고... 고통을 낫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고통은 늘 거기 있고, 다만 거기 있음을 같이 안다고 말해주기 위해 사람들은 책을 읽고 위로를 전하는지도 몰랐다.

<p.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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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추운 겨울, 작은 시골 동네 북현리에서 '굿나잇 책방'이라는 독립 서점을 운영하는 은섭과 서울에서 일을 그만두고 북현리의 이모 집으로 돌아온 해원의 만남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둘은 오랜 동창이었으나 서로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 다만 은섭은 해원을 오래전부터 좋아하고 있었다. 그리고 해원이 방문한 그 겨울 '굿나잇 책방'을 함께 운영하며 둘은 가까워지고 해원은 그녀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늘 은섭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추운 겨울과 시골 동네 북현리, 굿나잇 책방 등 배경에 대한 자세한 묘사 때문인지 책을 읽는 동안 소설 속 세상에 푹 빠져 있었다. 등장인물이 다양했지만 모두 개성이 있었고 그들 각각에 대한 묘사도 꼼꼼하게 빼놓지 않아 책 읽는 재미를 더했다. 비현실적인 요소가 없었음에도 왠지 모르게 겨울날의 판타지 소설 같다는 느낌을 종종 받았다. 추운 겨울의 시골 논밭 한가운데 오렌지색 불빛을 밝히는 작은 책방이 있고 늦은 밤이면 사람들이 모여 따뜻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이라 그랬을까. 그래도 누구나 한 번쯤은 저런 공간 속에 있는 나를 상상해보지 않는가. 무릎을 덮은 담요와 푹신한 쿠션, 양손으로 감싸 쥔 따뜻한 차가 든 머그컵, 따뜻한 난로를 둘러앉은 좋은 사람들, 편하고 자연스럽게 나누는 대화... 현실에서는 그렇게 완벽한 감성의 순간을 가지기가 어려운데 책 속에 빠져 있는 동안 대리만족을 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감성적인 밤도 많았고 쓰고 싶은 말도 많았는데 요즘은 그런 날이 별로 없다. 감정이 메마른 듯하고 별생각 없이 사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면 그때의 감성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생각해봤다, 예전에 비해 덜 감성적으로 사는 이유. 아마 여러 가지일 것이다. 시간이 지나며 내 성격이 변했을 수도 있고, 사회와 가정에서의 내 위치 때문일 수도 있고, 감성을 느낄 만한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이유도 생각해보았다. 외로움의 부재. 기본적으로 감성은 외로움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외로워야 감성에 젖고, 생각하고, 글을 쓰는 것이 아닐까. 지금에 비해 10대와 20대 때에는 고민이 많았고 외로운 날이 많았다. 그래서 밤이면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음악을 듣거나 누군가를 그리워했다. 그러나 30대가 된 지금, 나는 예전에 비해 여러 면에서 안정된 삶을 갖게 되었다. 안정된 삶이 주는 행복을 누리고 있고 덜 외롭게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감성적인 밤들이 불필요해진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그렇다면 감성을 잃어버린 삶도 꼭 나쁜 것만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