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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파트에서 살아남기 > 김효한, 2013

by Ditmars 2021. 3. 6.

<아파트에서 살아남기> 김효한, 2013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내가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서 싸웠는지를 생각해보았다. 그 기나긴 싸움의 과정에서 나는 인간이 가진 모든 면을 본 듯 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공동체를 위해서 불이익을 함께 감수하는 희생을 보았는가 하면, 나만 살겠다고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내 조그마한 이익이라도 더 챙기면 그만이라는 이기심의 끝도 보았다. 의리를 지키면서 서로를 격려하는 강한 의지와 단결의 힘을 보기도 했지만 논리적으로 말도 안되지만 감정을 자극하는 선동과 이간질에 쉽게 넘어가는 의지의 나약함도 보았다.

<p.185>

 

 "모든 민주주의에서 국민은 그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 알렉시스 드 토크빌 (프랑스의 정치학자)

<p.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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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평범한 회사원이 아파트에 관한 사회의 시스템과 그것에 무관심한 사람들을 상대로 사투를 벌인 이야기다. 작가는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지만 그의 글은 읽기 쉽고 흥미진진하여 한 권의 책을 단숨에 읽게 한다. 아파트를 둘러싸고 사회에 만연한 부조리에 처절하게 사투를 벌이는 개인을 보면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모르고 살았으면 좋았을, 아니 알고도 모른척 할 수 있는 사회의 더러운 면을 그냥 지나치지 않은 작가가 존경스러웠다. 그리고 이렇게 한 사람의 삶이 망가져가는 희생이 있어야 천의 부조리 중 겨우 하나가 바뀐다는 사실에 사회에 대한 혐오와 허무가 동시에 생겼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큰돈보다 적은 돈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대형 마트에서 장을 볼 때면 천 원 할인에 싸게 샀다고 생각하고 점원의 몇 천 원의 계산 실수에 분노한다. 인터넷 쇼핑을 할 때면 몇 백 원의 할인을 받기 위해 회원가입의 절차와 쿠폰을 받는 수고를 마다한다. 다 같이 모여 식사를 하고 n분의 1로 음식값을 나눌 때도 몇 백 원의 차이까지 신경 쓴다. 그러나 대기업의 몇 백억에 해당하는 비리와 횡령, 국가의 조 단위 세금 낭비와 그에 따른 세금 인상, 차량 구매 시 우습게 나가는 몇백만 원의 옵션 가격, 법인 카드로 결제하는 몇 십만 원어치의 회식 비용 등에는 오히려 무감각하다. 또한 책에 나온 것처럼 1000세대의 아파트 관리비에서 세대 당 만원씩 불필요한 지출이 생긴다고 하면 한 달에 천만 원, 일 년에 1억 2천만 원이라는 큰돈이 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만원 더 나온 관리비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는 아마 그 돈이 내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지 않거나 그 돈으로 발생하는 재화나 서비스를 단기간에 체감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큰돈을 다루는 집단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이러한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이익을 챙긴다.

 이권에 대해서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공정함과 정직함에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눈앞의 이익에 정의와 양심을 지킬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사회의 부조리한 면에 조금 덜 분노할 수 있을까. 허무주의적 관점이긴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본다면 인간의 이러한 약점을 받아들이고 개인의 양심을 저버리는 일을 하기 어렵도록 여러 겹의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사회에 더 필요한 일일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아파트 단지는 작은 사회라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다. 나 역시 재작년 아파트 분양을 받고 올해 입주를 기다리고 있는 입주예정자이다. 우리 아파트는 약 1500세대이므로 한 집당 3~4명의 세대원을 기준으로 한다면 약 6천 명의 사람들이 그 단지 내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6천 명이면 정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다. 지금까지 군대, 학교, 회사 어디에서도 그만큼의 사람들과 동시에 지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내가 먹고 자는 곳은 고작 34평 남짓의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이기에 살면서 이 사실을 체감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내 주위에 6천 명의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그러나 이 생각을 한 번 하고 나니 주변의 아파트 단지가 왠지 모르게 징그러워졌다. 투명한 유리 상자에 만들어진 개미집처럼 아파트를 세로로 잘라 멀리서 그 단면을 볼 수 있다고 가정했을 때 그 속에 바글바글할 사람들을 생각하니 소름이 끼치는 기분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우리는 이러한 작은 사회에서 살고 있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