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중산층의 기준은 하나 이상의 외국어를 하고, 직접 즐기는 스포츠가 있고,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으며, 근사한 요리 실력을 소유하고, 사회적 정의에 민감하며, 봉사활동을 꾸준히 하는 것이라고 한다. 다른 유럽 국가나 미국 중산층의 기준 역시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성공과 무관한 내용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그 사회에도 한순간에 성공하거나 사다리를 타고 계층을 순간 이동하는 이들이 있으며, 우리는 그런 얘기를 뉴스를 통해 듣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소수에 불과하며, 그만큼 특이하기 대문에 한국에 사는 우리의 귀에까지 들리는 것이다. 인생 역전한 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그렇게 살다가 그냥 그렇게 죽는다. 그런데도 그들의 행복도가 우리보다 훨씬 높고, 그 사회가 지루하면서도 천국인 이유는 아마 우리 사회보다 더 역동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런 역동성이 필요 없기 때문일 것이다. (...)
자신이나 자신의 자녀가 학자금, 자택과 차량 구입에 쓴 빚을 평생 동안 조금씩 갚고, 대학은 신중하게 고려해서 그 수지타산에 맞는 자녀만 스스로 알아서 진학하고, 평생 한 동네에서만 살고, 그러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조용히 죽어갈 것이라는 상상은 하기도 싫고 받아들일 수도 없다. 그러나 사실 그것이 우리가 부러워하는 소위 선진국의 대부분 국민들이 살고 있는 모습이며, 지루한 천국으로 변해가는 과정이다. 그들이 그 천국에서 살아가는 지혜는 물질적 성공과 성장 이외에 삶의 의미와 가치를 스스로 빨리 찾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직 그러지 못한 한국인들은 우리 사회가 지루한 지옥으로 변해갈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처럼 보인다.
<p.48>
많은 전문가들이 한국 사회의 유언비어, 부적절한 댓글과 같은 폭력적인 인터넷 문화에 대한 다양한 설명을 제공한다. 하지만 그 근본적인 원인은 이런 행위가 한국인들의 무엇을 만족시켜주느냐를 보면 바로 나온다. 그것은 내가 뭔가를 바꾸고 있다는, 나의 영향력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은 주체성이 만족되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나 혼자 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수만 명이 모여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느낌은 한국인에게 유달리 중요하다.
<p.69>
해방과 전쟁을 겪으며 자라난 한국 기성세대들은 매우 불우한 과거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이들에게는 그런 어려움을 극복한 자부심도 있지만, 동시에 그에 대한 두려움 또한 가지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정체감과 존재감을 확인할 충분한 기회 없이 지난 60년을 달려왔다. 그래서 사실 한국의 많은 기성세대들의 존재감은 독립적으로 존재하기보다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누구의 아버지, 누구의 어머니, 누구의 자식, 누구의 상사, 누구의 친구, 누구의 부하 등과 같은 수많은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 이런 관계적 존재감이 충분히 느껴지지 않는 상황은 너무나도 불안하고 동시에 좌절스러운 상황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국 사회에 수없이 일어나고 있는 갑질은 바로 그런 존재감의 상실에서 비롯된 분노가 원인이었다.
<p.79>
하지만 현실 속의 우리의 모습은 불완전함으로 넘쳐난다. 진실과 진리를 추구하는 데 그리 큰 관심을 가지지도 않고,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선하고 바른 선택을 하지도 않는다. 일부 주어진 정보에 너무나도 쉽게 만족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떤 정보가 주어지기도 전에, 이미 우리 마음속에는 믿고 싶어 하는 것들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인간의 사고 과정은 우리의 기대만큼 그리 합리적이지도 객관적이지도 않다고 얘기한다.
<p.112>
"한국 사람들은 복잡한 사회적 관계를 규정하고 관리하는 심리적 도구까지 발전시켰는데, 그것이 바로 체면이다."
- 최상진 교수
<p.159>
하지만 한국에서는 괜찮다고 얘기해도 그건 진짜 괜찮은 게 아니다. 아니, 실제로 뭘 원하는지 알 수 없을 때도 있다. 행동의 바탕에 항상 어떤 의도가 깔려있는지 생각해봐야 하고, 보이는 행동과는 다른 진의가 있는지를 고민하고 읽어야 한다. 그래서 몇 번이고 계속 권한다. 아니, 강요한다. 우리는 이걸 '배려'라 부르고,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 '눈치'라는 심리적 기제를 발달시켰다.
이런 고맥락적 의사소통의 특성은 행동보다는 '마음'을 중시하고, '심정'을 알아주길 바라는 심정중심주의에서 비롯된다. 한국 사회에서 체면이 중요하고 그것이 곧 사회적 덕목이 될 수 있는 이유도 이 심정주의 때문이다.
<p.203>
착각적 통제감과 비현실적 낙관주의는 서로 협동해서 인고의 착각을 일으키기도 한다. 지금 고생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지금 뭔가를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실제 그것이 미래의 성공을 위해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상관없이 장밋빛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믿는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지금 더 고생해야지 훗날 더 크게 성공할 거라는 믿음에, 현재를 더 고생스럽고 더 고통스러운 상황에 몰아넣으려 하는 것이다. 왜 그래야 하는지도 잘 모르면서.
한국 부모들과 외국 부모들은 사실 그리 큰 차이가 없다. 외국 부모들도 자녀가 공부를 잘하길 바라고, 잘하면 좋아하고, 가능한 한 학업을 지원하며, 자녀가 여러 면에서 성공하고 행복하길 바란다. 그런데 큰 차이는 한국 부모들은 청소년인 자녀가 놀고 있는 걸 못 본다는 것이다. 종종 그들은 자녀에게 이런 얘기를 한다. "너무 즐거운 거 아니니?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라고. 즐거워하는 그들의 모습이 뭔가 잘못된 것처럼,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의 행복과 즐거움은 포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 과연 이런 주장은 정말 근거가 있는 것일까?
<p.214>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인고의 착각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막막한 상황에, 사람들은 불안하니까 그냥 아무거나 한번 해보려고 한다. 아니, 남들이 하는 걸 그냥 따라 한다. 매도 같이 맞으면 덜 아프니까. 아마 지금 자녀 사교육에 모든 것을 쏟아붓고 있는 많은 한국의 부모들은 사실 그것 외에는 뭘 해야 한지 모르기에, 아무것도 안 하고 있자니 불안하기에 그러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자녀를 위해 스스로 먹고 싶은 것, 입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하면서 고통의 시간을 보낸다. 나중에 자녀가 성공할 거라는 인고의 착각에 빠진 채로...
지금 당장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결코 자원이나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다.
<p.220>
이런 문화적 차이는 다소 착각의 여지가 있더라도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보려는 자기고양self-enhancement을 서양인들에게 선물했고, 서양인들은 실제보다 자신을 더 잘난 사람으로 믿는 경향을 강하게 가지게 되었다. 반대로 한국인들에게는 스스로를 어떻게 보는가 보다는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는가가 중요했고, 긍정적인 평가를 얻어내기 위해 실질적인 발전을 이루어내는 자기향상self-improvement이 더 절실했다. 실제로 많은 비교문화 연구에서 서양인들은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정보를 원하고 그것을 더 가치 있게 평가하는 반면에, 한국인을 포함한 동북아시아인들은 자신에 관한 부정적인 정보를 가치 있게 평가하고 더 중요하게 다루는 것으로 밝혀졌다. 즉, 동북아시아인들은 무엇을 더 발전시킬 수 있는가를 알아내는 것을 항상 제일 중요하게 생각해온 것이다. 이런 자기향상에 대한 심리적 성향은 당연히 우리들로 하여금 '노력'을 강조하게 만들었다.
<p.228>
"이제 우리나라에는 가난한 사람은 없다. 부자가 되지 못한 사람들만 있다."
- 박노해
<p.241>
인류의 역사 역시 최근 약 200년 정도를 빼고는 기본적으로 결핍의 연속이었다. 태초부터 인간은 오랜 세월 동안 부족한 식량, 매서운 추위, 갖가지 질변, 불편한 잠자리, 위험한 맹수들로부터 노출된 채 살아왔다.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 시스템이 항상성의 원리에 지배받는다는 것은,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당연히 설득력이 있다. 특히 한국인들에게 근현대사는 모든 것이 결핍되었던 너무나도 가혹한 시대였다.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겪으면서 한국인들은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조차도 가질 수 없었다. 이러한 지독한 결핍의 경험은 우리의 심리체계에 결여된 그것들에 대한 집착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전 세계적에서 유례없는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성장을 이루어낸 우리 사회는 객관적으로 보면 더 이상 결핍의 시대를 겪고 있지 않다. 계속해서 결핍의 요소에 관심을 가지고 모든 것을 결핍으로 이해하려고 해서 그렇지, 사실 우리는 엄청나게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다. 단지 풍요가 너무 급작스럽게 찾아와서, 우리의 심리 시스템이 이를 쫓아가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
과거에, 의식주의 해결이 곧 잘사는 것이었던 결핍의 시절에는 잘 살기 위해 해야 하는 것들이 빤히 정해져 있었다. 이때는 뭘 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가 중요했다. 즉, 고통과 노력이 양이 미래를 결정했던 시대였다. 마치 길이 정해져 있을 때, 누가 얼마나 빨리 달리느냐가 중요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길이 수천 가지, 수만 가지로 늘어났다. 잘 사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너무나도 다양해졌다. 따라서 그냥 열심히 빨리 달려가는 게 아니라,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가 훨씬 더 중요해졌다. 이때 필요한 것이 창의성이다. 창의성은 잘살기 위한 수단도, 공부를 잘하기 위한 조건도 아니다.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게 창의성이다.
<p.252>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는 형제들 간의 탄생 순서에 따라 형성되는 성격에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형제 중에 첫째로 태어난 아이는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 세상이 모두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마음의 평화를 누리며 산다. 동생이 태어나서 부모의 관심이나 사랑을 조금 잃을 수는 있지만, 동생이라는 존재는 자신에게 항상 큰 우월감을 느끼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가 된다. 최소한 성격이 형성되는 아동기까지, 동생에 비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유능감과 동생에 비해 더 많은 우선권과 더 강한 발언권을 부여받는 경우가 많다. 이런 첫째 아이는 자라면서 세상은 원래부터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인식을 갖는다. 사회적 체계와 규범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며, 그것을 유지하려는 경향성을 가지기 쉽다. 그래서 대부분의 첫째 아이는 부모와 사회의 기대를 저버리지 못한다. 때로는 답답할 정도로 바른생활을 추구한다.
반면에 둘째는 태어나면서부터 열등감을 가질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항상 자신을 앞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첫째는 계속 거슬리는 존재다. 우선권과 결정권, 발언권을 아무런 근거 없이(최소한 둘째에게는 그렇게 느껴진다) 첫째인 형이나 언니에게 주고 있는 사회적 체계는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그들은 사회에 더 반항적이고 더 많은 불만을 품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둘째는 기존의 규범이나 사회적 제약을 거부하고 그것에 구애를 받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의 사고와 행동은 더 자유롭고 혁신적이며 모험적인 경향이 강하다. 대신 당연히 더 위태로워 보이고 때로는 무모해 보일 수도 있다.
<p.262>
어렸을 때부터 항상 중용의 가치를 배우고 융화, 화합을 추구하도록 교육을 받아와서인지 한국 사람들은 모순되는 감정이나 주장을 쉽게 수용하는 경향이 있다. 좋으면서도 싫기도 하고, 기쁘면서도 슬플 수 있다는 이런 특징은 동양 문화의 특성인 변증법적 사고dialectic thinking와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굳이 하나를 위해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기도 싫어하고, 그렇게 하라고 강요하는 사람도 싫어한다. 그래서 한쪽을 선택하면서도 다른 쪽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착각에 자꾸 싸면서도 좋은 걸 내놓으라고 하고, 안전비용을 줄이면서도 더 안전해질 거라고 믿고, 일을 꼼꼼하게 하는 동시에 빨리 하라고 요구한다.
<p.282>
종교를 잘 모르는 필자의 눈에도,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서 한국 종교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점은 바로 그런 기복신앙적 특성이었다. 신앙을 가지는 주요 동기가 신앙이 추구하는 어떤 관념적인 가치가 존재에 대한 추구보다는, 현세적이고 단기적인 이익에 있다는 것이다.
<p.286>
역사적으로 보면 종교는 한 사회 구성원들의 가치관과 그들이 인생에서 추구하는 바를 반영하고 동시에 규정하는 역할을 해왔다. 인간이 어떤 존재이며, 인생의 의미는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가다가 어떤 모습으로 죽어갈지, 심지어 죽음 이후 어떻게 되는지까지도 규정하고 있는 것이 종교다. (...) 이처럼 한 사회에서 종교라는 것은 그 사회를 유지하고 운영하는데 근간을 제공해왔다고 봐도 지나치지 않다. 그래서 전 세계 많은 국가들은 그 나라 국민의 다수가 믿는 지배 종교를 가지고 있다. (...)
그렇다면 현재 한국 사회에서 각각의 종교가 균형 잡힌 배분을 이루고 있는 사실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할까? 바로 오랜 역사를 가졌다고 믿는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관이나 사상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한국의 기성세대가 태어나서 성장하는 동안, 자신이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지를 암묵적으로나 명시적으로 강제해온 강한 사회적 규범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아마도 우리 사회는 근대 역사의 과정에서 그런 가치들을 잃어버렸을 가능성이 크다. (...)
지금의 한국인들에게 자신과 가족의 성공과 안녕을 포기할 만큼 지켜야 하는 그것이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자신 있게 "바로 _____입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p.290>
아마 몇 세대가 더 흘러 우리 자손들 중에 생존이나 경쟁, 세속적 성공을 걱정하지 않는 이들이 계속해서 늘어나면, 변화는 일어날 것이다. 돈이나 물질 대신에 그들 나름대로의 가치를 찾아 그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러면 자신들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돈을 기부하거나 회사를 포기하고, 사회에 모두 환원하는 등 인생을 멋지게 사는 사람들도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아직 한국 사회는 가진 자는 가진 것을 잃어버릴까 봐 전전긍긍하고,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지고 싶은 욕망과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 국민의 대다수가 믿는 지배적인 종교(신념, 가치)가 생겨날 때까지 우리 사회의 심리적 성숙도는 천천히 성장할 것이다.
<p.301>
선택은 가지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선택의 과정에서 가지는 것에만 목숨을 건다. 그러니 당연히 포기해야 하는 것들을 인식하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p.308>
문제는 자사고를 폐지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일반고에서 무엇을 가르치고, 학생들이 무엇을 배우며, 어떤 학생들이 배출되는지, 즉 교육의 성공을 무엇으로 평가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없다는 것이다.
전체 고교생 수의 3퍼센트만을 차지하는 자사고에 비해 97퍼센트의 일반고 학생이 뒤처진다는 문제보다는, 97퍼센트나 되는 일반고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가 더 중요한 문제다.
<p.319>
사실 원래 춤추고 싶어하는 고래에게는 칭찬이 필요 없다. 춤추고 싶지 않거나 춤출 이유가 없는 고래를 춤추게 할 때만, 칭찬과 같은 외재적 동기가 필요하다. (...) 넓은 바다에서 혼자 헤엄치는 자유로운 고래가 춤을 추거나 물 위로 뛰어오르는 이유는 누군가 옆에서 칭찬해서가 아니다. 바다의 고래는 그냥 춤추고 싶어서 춘다. 이들에게는 칭찬이 아니라 아마 그들만이 들을 수 있는 음악이 필요할 거다. 그럼 알아서 춤춘다.
<p.324>
그래서 우리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에만 집중하려고 한다. 불확실한 것,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은 피하고, 직접 측정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한다. 모든 것을 수치화하고, 그 수치를 마치 진실인 것처럼 착각하면서 산다. 이것이 불확실성 회피다. 한국인 특유의 물질주의, 성공지상주의, 결과주의, 장기적 전략의 부재와 같은 현상들은 바로 이런 불확실성 회피의 성향에서 비롯된다.
<p.337>
의사가 되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의대 입시에서 수험생의 생명에 대한 존중 사상이나 아픈 사람에 대한 측은지심을 입시기준에 포함했다는 대학은 내 평생 들어본 적이 없다. 어려서부터 생명을 아끼고 타인을 배려하는 청소년이 의대에 들어갈 확률은 사실 그리 높지 않다. 내신 상위 1퍼센트에 들지 못하면 의대는 아예 꿈도 꾸지 못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저 학교나 도서관에서 죽어라 공부한 학생이 교사가 되거나 의사가 되거나 공무원이 된다. 확률적으로만 생각해도 평소에 봉사정신이 투철하고 휴머니즘이 충만하며, 공적 의식이 강한 학생이 그런 시험에 합격할 가능성이 더 높을까, 아니면 매우 목표 지향적이고 개인적인 욕망이 강하고 이기적인 학생이 합격 가능성이 더 높을까?
<p.354>
한국 사회가 이처럼 수치화된 객관적인 평가에만 매달리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한국 사회의 신뢰 수준이 낮아서라고 한다.
<p.356>
한국 사람들에게 평가는 좋은 결과나 잘난 사람을 찾아내는 과정이 아니라, 나쁜 결과나 못한 사람을 찾아내는 과정으로 인식된다. 그러니 평가를 통해 뭔가 얻는 사람은 없고, 잃는 사람만 생긴다.
<p.372>
현재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정서는 불안이다. 우리 사회는 초중고등학생들은 대학입시에 대한 불안, 청년은 취업과 진로에 대한 불안, 중년은 자녀양육과 실업에 대한 불안, 노년은 노후와 죽음에 대한 불안으로 불행을 겪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런 불안은 전 세계 같은 연령대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고민들에서 비롯된지만, 현재 우리 사회에서 유달리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는 한국인들이 그런 인생의 도전과 과제들을 바로 예방적 동기에서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방적 동기의 관점에서 그런 관제들은 단지 달성하면 좋은 보상이 아닌, 반드시 달성해야만 하는 어떤 것, 그래서 달성하지 못하면, 저 아래 절벽으로 떨어지는 처벌이 기다리고 있는 불안의 존재가 된다.
<p.375>
더구나 물건의 크기, 속도, 무게 등 측정 가능하고 수치화할 수 있는 측면에만 집착해온 한국 기업들이 몰랐거나 무시했던 것은 바로 인간의 '경험'이다. 눈에 보이지 않고, 수치화할 수도 없고, 확인할 길도 없는 인간의 경험 따위는 그들에게는 그저 헛소리에 불과했다. 누군가 힘들다, 왠지 느낌이 좋지 않다, 하기 싫다고 얘기하면, 그런 사람에게 "너가 아직 배가 덜 고프구나."라고 핀잔이나 주는 사회에서 인간의 섬세한 감정이나 경험 따위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은 것이었다.
<p.387>
우리 문제의 본질은 무엇을 만들 기술이 부족한 것보다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p.390>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허태균 교수가 한국인 특유의 문화심리적 특성을 주체성, 가족확장성, 관계주의, 심정중심주의, 복합유연성, 불확실성 회피, 이렇게 6가지로 나누어 설명한 책이다. 책의 뒷면, 소설가 황석영 작가의 추천사에 적힌 말처럼 '저자의 관점에 전적으로 찬동할 수는 없지만' 전반적으로 읽기 쉽고 재미있는 책이다. 특히, 지금 우리 사회에 많은 불만과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는 나를 포함한 젊은 세대는 읽으면서 속이 시원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분명 과거보다 더 풍요로워졌는데 왜 현실 사회는 사는 것이 더 힘들어졌을까? 기성 세대의 말처럼 힘들다는 건 젊은 세대들의 엄살이고 노력이 부족한 탓일까?" 지난 몇 년간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고민 중 하나이다. 그리고 이 고민은 한국 사회에서 생애 주기를 지날수록 즉,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육아를 하면서 더 깊어져만 갔다.
우리 세대는 대체로 자라면서 배고팠던 기억이 없다. 사는 곳에 대한 걱정도 없었다. 대학 등록금도 대부분 지원을 받았고 결혼할 때도 양가 부모님의 도움으로 작지만 편리한 아파트에서 시작했다. 육아도 힘들다고는 하지만 부모님 세대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정부에서 돈도 주고, 돌 지나면 어린이집도 보낼 수 있고, 휴대폰으로 주문하면 바로 다음날 배송되는 갖가지 음식들과 여러 가전제품 덕에 집안일도 많이 덜었다. 게다가 자녀도 많아야 두 명 혹은 세 명, 거의 대부분의 가정이 한 명을 키우면서 유독 힘들어하고 육퇴(육아 퇴근), 육아 지옥 등의 말을 사용한다. 당장 나조차도 우리 세대가 이렇게까지 힘들어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이 모습을 바라보는 기성세대들은 오죽할까. 그들이 배가 불렀다고 얘기하는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에서 내 고민에 대한 대답의 일부를 얻을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기성 세대와 젊은 세대가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은 태어나 왜 사는지, 인생은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에 대한 생각이 서로 확연히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성세대가 주류로 있는 우리 한국 사회에서 젊은 세대의 시각이 존중되지 않기 때문에 젊은 세대 눈에는 한국 사회가 헬조선으로 비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좀 더 자세히 얘기해보자면 이 책에 나온 것처럼 기성 세대의 삶에 대한 인식은 '결핍과 생존'이다. 그들은 돈이 부족해 당장 내일 먹을 것이 없었고, 전쟁으로 집을 잃어 잘 곳이 없었고, 하고 싶은 일은 당연히 포기해야만 하는 말 그대로 생존이 목적인 인생을 살았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먹고사는 데에 걱정이 없고 후손을 남기는 것이 목표였던 원시 시대 인류의 삶과 비슷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들이 살아온 환경은 그렇게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풍요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었음에도 그렇게 살아왔던 과거와 그렇게 해야만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에 반해 젊은 세대는 결핍과 생존에 대한 고민이 불필요한 시대를 살았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의 1차적 욕구인 생리적, 안전 욕구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왜 사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나의 인생을 살기 위해'와 같은 대답을 한다. 삶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달라진 것이다. 이들에게는 취업도, 결혼도, 육아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여러 삶 중 하나이다. 예전에는 먹고살기 위해서 해야만 했던 일들이,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큰 고민이 없는 지금은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혼자 살면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자신의 인생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가는 일본의 프리터족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두 세대가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방식에는 큰 차이가 생겼다. 그 이유는 단기간에 이루어진 한국 사회의 폭발적 성장으로 서로가 살아온 환경이 너무나도 다르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서양에서는 성장 이후 시간이 서서히 지나면서 이 차이가 좁혀지기도 했고,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는 방향으로 사회가 흘러갔다. 부모도 부모이기 이전에 개인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자녀의 다양한 삶의 방식도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점이 그러하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아직까지 기성 세대가 사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사회다. 그들의 가치관과 그들이 만든 규범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여전히 남들 하는 대로 해야 하고,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제일 중요하고, 남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생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젊은 세대들이 기성세대가 만든 틀 안에서 지내려다 보니 젊은 세대들의 인생은 고달플 수밖에 없다.
다시 나의 고민으로 돌아와보자면, 지금 우리 사회는 과거보다 분명히 풍요로워졌다. 그럼에도 젊은 세대들은 한국 사회에서 살기 힘들다고 한다. 두 문장 모두 맞는 말인데도 이해가 안 된 이유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이 곧 좋은 삶,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기성세대로 변해가고 있는 듯하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물질적으로 부족해서 불행한 것이 아니다. '옛날에는 먹을 걱정, 입을 걱정 하면서 살았는데 지금 너희들은 도대체 뭐가 힘들다고 난리니?'라며 물질적인 풍요로움에 초점을 맞추고 젊은 세대의 고민을 이해하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물질적인 건 해결된 세상이다. 전 세계가 마찬가지이다. 인류가 출현한 이래 지금처럼 먹고 살기 쉬워진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 젊은 세대들은 정신적으로 행복한 삶을 찾고 있다. 그 삶은 제각기 달라서 누군가에게는 대학을 안 가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프리터가, 누군가에게는 비혼이, 누군가에게는 딩크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삶이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고 오히려 기성세대들로부터 비난까지 받고 있다. 남들이 강요하는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 것, 그 과정에서 내 인생의 의미가 부정당하는 것.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젊은 세대들은 지금 한국 사회가 살기 힘들다고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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