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를 쓸 때는 하루 웃었다 하루 울었다 했다. 하루는 글이 잘 써진다고, 이만하면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다가 다음 날에는 전날 쓴 글을 버리고 다시는 글을 쓸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꾸준히 써야 한다고들 말했다. 적어도 오 년을 꾸준히 썼지만 글이 늘지 않았다. 평생을 써도 아무 의미 없는 장면들만 만들어내리라는 공포가 근육을 굳게 했다.
내가 창의적이지 않은 사람이라는 사실, 능동적인 사람은 더더군다나 아니며 암기식 교육이 오히려 편하게 느껴지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토록 싫어했던 제도권 교육 안에서 나는 얼마간 편안함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영어 단어를 외우는 동안 매일 채용 사이트에 들어가서 취직자리를 알아보는 일도 거르지 않았다.
<p.56>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투이의 유치한 말과 행동이 속깊은 애들이 쓰는 속임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런 아이들은 다른 애들보다도 훨씬 더 전에 어른이 되어 가장 무지하고 순진해 보이는 아이의 모습을 연기한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통해 마음의 고통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각자의 무게를 잠시 잊고 웃을 수 있도록 가볍고 어리석은 사람을 자처하는 것이다. 진지하고 냉소적인 아이들을 어른스럽다고 생각했던 그때의 나는 투이의 깊은 속을 알아볼 도리가 없었다.
<p.86>
엄마는 처음에는 한 달에 두 번 이모를 찾아가다가 나중에는 한 달에 한 번, 두 달에 한 번, 계절에 한 번 안양에 찾아갔다. 가끔씩 통화를 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 피상적인 이야기만 주고받았다. 이모는 엄마에게 솔직하지 못했고 엄마 또한 그랬다. 엄마를 살얼음판을 딛듯이 이모의 상처가 닿지 않은 마음들만을 디디려 했고 이모는 엄마가 이모를 조금이라도 가여워할까 봐 애써 아픈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엄마는 심지어 이모가 안양에서 정확히 무슨 일을 하고 사는지조차 몰랐다. 서로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했던 그런 태도가 서서히 그들의 사이를 멀게 했고, 함께 살았던 시간 동안 쌓아왔던 마음들도 더 이상 그 관계를 지탱해주지 못했다.
<p.114>
우리는 싸움을 제외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서로를 견뎠다. 감정을 분출하고 서로에게 욕을 해서 그 반동을 확인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었다. 싸움도 일말의 애정이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그를 미워하지 않았고 그도 나를 미워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말이나 행동으로 상처받지 않았다. 그도 그러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나쁘게 대하는 법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가장 나쁜 건 서로에게 나쁘게 대하지도 못하는 그 무지 안에 있었다.
<p.129>
"기억은 재능이야. 넌 그런 재능을 타고났어."
할머니는 어린 내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건 고통스러운 일이란다. 그러니 너 자신을 조금이라도 무디게 해라. 행복한 기억이라면 더더욱 조심하렴. 행복한 기억은 보물처럼 보이지만 타오르는 숯과 같아. 두 손에 쥐고 있으면 너만 다치니 털어버려라. 얘야, 그건 선물이 아니야."
하지만 나는 기억한다.
불교 신자였던 할머니는 사람이 현생에 대한 기억 때문에 윤회한다고 했다. 마음이 기억에 붙어버리면 떼어낼 방법이 없어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는 법이라고 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이 죽거나 떠나도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라고, 애도는 충분히 하되 그 슬픔에 잡아먹혀버리지 말라고 했다. 안 그러면 자꾸만 다시 세상에 태어나게 될 거라고 했다. 나는 마지막 그 말이 무서웠다.
시간은 지나고 사람들은 떠나고 우리는 다시 혼자가 된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기억은 현재를 부식시키고 마음을 지치게 해 우리를 늙고 병들게 한다.
할머니는 그렇게 말했었다.
나는 그 말을 언제나 기억한다.
<p.164>
(...)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때 나는 나보다 약한 누군가를 도와주는 내 모습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말로는 친구라고 하면서도 내가 미진보다 더 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너는 나 없이 아무것도 못해, 라고. 미진이 점점 더 러시아 말을 잘하게 될수록, 저의 도움이 필요 없어질수록, 매력적인 친구들과 어울릴수록 미진에게 화가 났습니다. 미진이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어요. 넌 아무것도 아니야. 넌 아무것도 아니야. 그게 날 견딜 수 없게 하더군요. 이타심인 줄 알았던 마음이 결국은 이기심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 건 미진이 떠난 이후였습니다."
<p.193>
엄마는 매사가 그런 식이었다. 김치가 잘 익었다고 감사, 돼지고기 가격이 내려 마음껏 먹을 수 있음을 감사, 발가락에 난 사마귀 치료가 잘된 것을 감사, 일을 할 수 있는 건강을 허락해주심에 감사, 외식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 일이 잘 안 풀리면 일이 잘 풀릴 때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음을 감사.
엄마의 감사 타령 속에서 그녀는 오히려 엄마의 초라한 현실을 봤다. 언제든 외식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굳이 그런 일에 감사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 언제든 양껏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돼지고기 가격이 내렸다고 감사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 돈이 있다면, 부유한 부모나 남편이 있다면 통증을 견뎌가며 매일 열 시간씩 서서 일할 수 있음을 감사할 필요가 없을 것이므로. 그녀는 차라리 엄마가 스스로의 처지에 솔직해져서 불평하기를 바랐다. 초라한 현실에 대한 엄마의 감사가 얼마간은 기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p.217>
그 시절은 갔지만 여자는 미카엘라에게서 받은 사랑을 잊지 못했다. 세상 사람들은 부모의 은혜가 하늘 같다고 했지만 여자는 자식이 준 사랑이야말로 하늘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미카엘라가 자신에게 준 마음은 세상 어디에 가도 없는 순정하고 따뜻한 사랑이었다.
<p.222>
여자는 옆에 앉아서 꾸벅꾸벅 조는 노인을 바라봤다. 이 노인은 얼마나 여러 번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렸을까. 여자는 노인들을 볼 때마다 그런 존경심을 느꼈다. 오래 살아가는 일이란,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오래도록 남겨지는 일이니까. 그런 일들을 겪고도 다시 일어나 밥을 먹고 홀로 길을 걸어 나가야 하는 일이니까.
<p.218>
이 책은 <쇼코의 미소>, <씬짜오, 씬짜오>,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한지와 영주>, <먼 곳에서 온 노래>, <미카엘라>, <비밀> 이렇게 7편의 작품이 실린 단편소설집이다. 또한 작가는 표제작인 <쇼코의 미소>로 2013년에 젊은작가상을 수상하였다. 등단한 지 두 달이 되지 않은 시점에서 수상했다고 하는데 참으로 세상에는 숨겨진 보석과도 같은 천재들이 많이 있는 것 같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가 기억이 난다. 책을 덮고는 몸 속 어딘가에 묵혀 있던 통증이 입으로 새어 나오듯 낮은 신음소리를 길게 내었다. 슬프진 않았지만 가슴은 먹먹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충분히 겪어보았을 법한 일들을 담담하게 풀어내는 이 소설은 그 담담함 때문에 오히려 더 현실적이고 가슴이 아프다. 현실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받는 상처와 고통이 만들어내는 감정의 동요가 집채만 한 파도일 것 같지만 사실은 잔잔한 물결과도 같은 것처럼 말이다. 다들 그렇게 평범하게 고통을 극복하고 상처를 회복하며 살아가고 있다.
삶은 드라마가 아니기에 고통의 순간에 슬픈 BGM도 들리지 않고, 운명처럼 내 마음을 헤아려주는 사람도 없다. 아픈 마음에 무작정 버스를 타고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종점까지 가본들 나를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나는 그저 평범한 승객 중 한 명에 불과하다. 내게는 비참하고 힘든 하루가 누군가에게는 딱히 기억도 나지 않을만큼 지극히 지루한 여러 날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 절망의 순간에도 이 세상과 사람들은 내게 관심이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상처와 고통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삶을 사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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