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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은 도끼다 > 박웅현, 2011

by Ditmars 2021. 6. 16.

<책은 도끼다> 박웅현, 2011

 

 삶에서 실수는 필수 불가결한 것입니다. 그러나 줄여야 하죠. 왜냐하면 하나의 실수로 인해 하나의 가능성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의 말대로 "지금 나의 불행은 언젠가 내가 잘못 보낸 시간의 결과"라는 건데요. 돌아보면 정말 그렇습니다. 내가 중고등학교 때 했던 어떤 행동이 오 년 후의 나와 다 연결이 되거든요. 인생에 정말 공짜란 없습니다.

<p.32>

 

 피카소가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정교한 그림을 그리는 건 힘들지 않았지만, 다시 어린아이가 되는 데 사십 년이 걸렸다고요. 우리는 0세에서 100세를 놓고 봤을 때,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로 가면서 지식이 계속 쌓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지식을 얻는 대신 가능성을 내주는 것이죠. 지식을 쌓으면서 놓치고 있는 많은 부분들을 우리는 그 누구도 보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p.37>

 

 삶은 목걸이를 하나 만들어놓고 여기에 진주를 하나씩 꿰는 과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진주는 바로 그런 삶의 순간인 겁니다. 딸아이가 중학교 3학년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삼 주 정도 해외여행을 가자고 했더니 난리가 난 겁니다. 삼 주면 수학 수업, 영어 수업을 몇 번이나 빠져야 하는지 아느냐는 거죠. 얘기 끝에 가족이 내린 결론은 이거였습니다. 아마도 수학을 놓치고 영어를 손해 볼 거다, 하지만 평생 아이가 가져갈 수 있는 순간, 우리가 살면서 문득 떠올릴 수 있는 순간, 마지막에 당신은 뭐가 생각나느냐는 질문을 받고 떠올릴 순간, 이런 것들 하나가 생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죠. 진주 한 알이 생길 수 있는 것이라는 얘기를 했어요. 그런데 그 진주들은 내가 눈이 있고, 훈련이 되어 있어야 생길 수 있는 것이거든요.
 그런 면에서 저는 행복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 그리고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p.50>

 

 "시인의 재능은 자두를 보고도 감동할 줄 아는 재능이다."
 - 앙드레 지드

<p.87>

 

 우리가 이렇게 보지 못하는 이유는 늘 보아서입니다. 저는 자주 "결핍이 결핍되어 있다"는 말을 합니다. 만약 우리나라에 수박이라는 게 없어서 어느 날 수박이라는 걸 처음 수입해 나눠줬다고 칩시다. 생전 처음 수박이라는 걸 본 거죠. 그럼 김훈이 보듯이 볼 겁니다. 동그란 녹색에 검은 줄은 뭐지? 그 속의 빨간색은? 그 씨앗은? 달콤한 맛은? 이렇게 되는 거죠. 결핍의 결핍, 너무 낯이 익어서 볼 수 없는 겁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도 그의 소설 속 주인공인 조르바를 토해 "그에게 두려웠던 것은 낯선 것이 아니라 익숙한 것이었다"라고 얘기합니다. 우리는 익숙한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있습니다. 익숙한 것 속에 정말 좋은 것들이 주변에 있고, 끊임없이 말을 거는데 듣지 못한다는 건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p.90>

 

 워홀이 얘기했던 건, "플라톤 당신은 생활이 우선이고 예술은 잉여물이다. 오스카 와일드 당신은 모든 생활은 예술을 닮고 싶어 한다. 그래서 예술이 더 지상에 있다고 했는데, 아니다. 이 캠벨 수프가 내 식탁에 있으면 생활이고 액자 속에 있으면 예술이다." 이겁니다. 그래서 워홀은 액자 속에 캠벨 수프를 집어넣고, 영화에서 보던 생활 속의 마릴린 먼로도 액자에 넣고 예술로 만들어요. 그렇게 해서 생활과 예술을 보는 세 번째 관점을 워홀이 내놓았다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p.113>

 

 "거지가 질투하는 대상은 백만장자가 아니라 좀더 형편이 나은 다른 거지다."
 - 버드먼트 러셀

<p.120>

 

 행불행은 조건이 아니다, 선택이다.

 책을 읽고 난 후 받은 감동과 여러 느낌들을 정리해보니 행불행이 이렇게 정리되더군요. 나는 불행해, 나는 행복해, 우리는 이것을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똑같은 현상을 두고 내가 행복을 선택할 것이냐, 불행을 선택할 것이냐라는 것이죠. 돈이 많아야 하고, 어디에 살아야 하고, 어디에 가야 하는, 그런 건 아니라는 겁니다. 다 가졌다고 행복할까요? 우리는 행불행을 조건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세의 문제라는 생각입니다. 행복은 조건이 아니라 선택입니다. '난 행복을 선택하겠어' 하면 됩니다. 행복은 운명이 아니니까요. 삶을 대하는 자세가 만들어내는 것이지 어떤 조건이 만들어줄 수는 없는 것이죠. 알랭 드 보통의 말처럼 밤의 별 밑에서 강렬한 경이감을 맛보는 삶, 그것을 행복하게 대하는 삶의 자세야말로 인생의 중요한 부분이 아닐까요? 결국 이렇게 정리할 수도 있겠네요.

 행복은 추구의 대상이 아니라 발견의 대상이다.

 행복을 추구하려고 하니까, 어떤 조건을 만족시키려다 보니 결핍이 생기는 겁니다. 하지만 행복은 발견의 대상이에요. 주변에 널려 있는 행복을 발견하면 되는 겁니다.

<p.122>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이냐.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가 되어야 한다.
 - 프란츠 카프카

<p.129>

 

 연민으로 사랑을 시작해 한없이 작아진 남자. 밀란 쿤데라는 이 사랑이야말로 진짜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연민, 즉 동정심은 타인의 불행을 함께 겪을 뿐 아니라 환희, 고통, 행복, 고민과 같은 다른 모든 감정도 함께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감정이입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가장 최상의 감정이라는 겁니다.

<p.249>

 

 내가 모자나 프록코트를 골라야 하는데, 솔직히 챙이 짧은 모자를 쓰고 싶어요. 그런데 지금 다 긴 모자를 쓰고 있으면 따라가요. 아주 중심이 잡혀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대부분 그렇죠. 사상도 똑같아요. 톨스토이의 작품에는 여기에 대한 비웃음이 꽤 많아요. 지금 우리 시대에도 있잖아요. 진짜 믿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얘기해야 멋있으니까 하는 사람들. 자신의 실체를 실체화한 게 아니라 시대의 흐름이니까 유행하는 가면을 쓰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죠.

<p.289>

 

 우리 주위에도 소위 엘리트 코스를 밟은 사람들을 보면 차분하고 흔들림 없는 눈빛이 있어요. 물론 나쁜 것은 아니지만 자칫 잘못하면 스스로를 옥죄는 자물쇠가 될 수 있는 그런 눈빛이죠.

<p.300>

 

 얼마 전 책을 다 읽은 딸아이와 카페에 앉아 책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딸아이는 레빈을 답답해했어요. 브론스키야말로 아빠가 말하던 카르페디엠을 실천하는 실존적인 사람이 아니냐고 하더군요. 그래서 말해줬습니다. 그것은 실존을 너무 표피적으로 해석하는 것 같다고 말이죠. 또한 실존은 단순히 오늘을 즐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집중하고 사는 것에 방점을 찍어야 하지 않을까 했어요. 감정은 늘 기복이 있고, 인생은 무상하고, 똑같지가 않고 늘 변합니다. 그렇다면 마음속에 올바른 재판관을 가지고 판단을 해야지, 그 순간에만 충실하겠다고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거니까요. 만약 서른까지만 살 인생이라면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평균수명이 늘어 칠십이 넘게 살아갈 인생인데 오 년 후, 십 년 후, 이십 년 후의 삶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는 없어요. 그 순간의 솔직함이 전부는 아니죠.
 언젠가 딸 연이가 인터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기자가 왜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냐고 물었습니다. 연이는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살고 말 게 아니니까 앞으로 행복하려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준비하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때의 이야기를 했죠. 그것과 같은 이치다. 위기의 순간 올바른 재판관의 손을 들어줘야 한다고요.

<p.312>

 

 우리는 지금 미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인류는 여태까지 우리가 사는 시대만큼 급변하는 시대를 경험한 적이 없어요. 1350년에 살던 사람이 타임머신을 타고 1850년으로 오면 그다지 살기 어렵지 않을 거예요.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달라졌고, 오백 년의 시간 차는 있지만 생활하는 규칙이나 한 사람이 태어나서 움직이는 물리적인 거리, 농경사회라는 기본은 달라진 게 없어요. 그런데 1850년에 살던 사람이 1950년으로 가면 기절해서 정신을 못 차리겠죠. 1950년에 살던 사람이 2010년으로 가면 또 정신을 잃을 거고요. 여기서 알 수 있는 게 뭐냐,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변화가 엄지손톱만 하다면 그 이후의 변화는 팔 하나만큼의 변화를 겪고 있는 겁니다.

<p.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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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는 저자의 말에서 이미 밝혔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소개하는 책을 읽어보고 싶게끔 만들고 싶다고. 그게 강독회의 목적이고 이 책의 목표라고 하였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 목적을 충분히 이루셨다'라고 말해주고 싶다. 지금껏 고전 읽기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책은 여러 번 읽어보았으나 이 책만큼 '나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책은 없었다. 

 

 이 책은 2011년 2월부터 6월까지 경기창조학교에서 열린 '책 들여다보기; I was moved by'라는 이름의 강독회 내용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작가가 지금껏 읽은 책 중에 많은 생각과 감동을 준 책들을 소개하고, 그 책들의 어떤 내용에 감동을 받았는지, 무엇을 느꼈는지 등을 소개하고 있다. 그중에는 유명한 고전도 있고, 처음 알게 된 책도 있고, 잘 아는 작가지만 잘 몰랐던 책도 있었다. 잠깐 소개하자면 김훈의 책, 알랭 드 보통의 책, 지중해 문학 중 <그리스인 조르바>, <이방인>,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안나 카레니나 등이 포함된다. 작가는 하나의 책을 여러 번 읽고, 밑줄을 치고, 포스트잇을 이용하여 문득 든 생각이나 감정을 적어놓는 식으로 독서를 한다고 한다. 이렇게 하나의 책에 대해 여러 번 읽고 깊게 생각하기에 삶에 영향을 줄 만한 커다란 고찰이 나오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대학생 때 인터넷에서 우연히 읽은 글귀를 프린트해서 책상 앞에 붙여놓았던 적이 있다. 스토아 학파 철학자인 에픽테토스가 한 말이다. 

 

 "어떤 책을 읽었다고 말하지 말라. 그것을 통해 그대가 얼마큼 더 나아졌고, 얼마큼 더 깊은 정신을 가진 인간이 되었는가를 삶에서 실천해 보일 수 있어야 한다. 책은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 내용을 다 읽었다고 해서 그대가 그만큼 성장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이다. 중요한 것은 그대의 삶이 어떻게 변화했는가 하는 것이다."

 

 서기 55년에 태어난 학자와 2011년의 광고 전문가는 같은 내용을 얘기하고 있다. 바로 능동적으로 책을 읽는 것이다. 나 역시 평소 책을 자주 읽는다는 나름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에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지금까지의 읽기는 여전히 수동적인 읽기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통해 느낀 감동과 생각을 정리하고, 거기에 덧붙여 나의 생각은 어떤지 깊이 생각해보고, 마지막으로 타인의 생각은 어떤지 들어보는 이런 일련의 능동적인 활동이 있어야 진정한 책 읽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는 김영하의 <읽다> 혹은 장정일의 <장정일의 공부> 등을 읽고도 동일하게 느낀 점이다. 

 

 어떤 책을 읽거나 짧은 글을 읽고난 뒤 누군가 "무슨 내용이야?"라고 물어보면 막상 말문이 막히는 경우가 있다. 분명 읽긴 읽었고 읽을 당시에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해를 하였는데 막상 그 내용을 설명하려고 하니 쉽게 정리가 되지 않는 것이다. 에픽테토스의 말에 의하면 이런 경우엔 이 책을 읽었다고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해했다고 치고 넘어가는 읽기다. 이렇게 읽은 책은 나의 내적 성장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가 느낀 생각과 감정은 금세 휘발되어버린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렇게 책을 읽은 건 소파에 앉아 멍하니 텔레비전을 본 시간처럼 그저 눈으로 글자를 따라다녔던 시간에 불과할 수도 있다. 

 

 나는 이렇게 읽는 습관의 원인이 '문제 풀이를 위한 읽기'에 있다고 본다. 수험생활과 취준생활을 포함하여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내가 치열하게 글을 읽었던 이유의 9할은 사실상 문제를 풀기 위함이었다. 이런 읽기는 글의 내용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내용에 초점을 둔다. 최소한의 시간을 들여 문제를 풀 수 있을 정도의 정보만 얻으면 되는 것이기에 문제에 맞춰 글을 읽는 것이 습관이 된 것이다. 이건 글을 읽는다고 하기보다는 찾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내겐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문장 하나의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할 때 그것을 곱씹어보며 해석해 볼 시간이 없었다. 오히려 내용의 이해와는 상관없이 빠르게 문제에 대한 정확한 답을 찾는 읽기를 하는 학생이 칭찬을 받았으니 말이다.

 

 이런 점 때문에 작가는 책에서도 많은 책을 읽는 다독과 속독보다 하나의 책을 여러 번 읽는 것을 추천하지 않았을까. 지금까지의 나의 독서 습관은 어떠했는지, 무엇을 위한 독서였는지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