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아는 이야기지만 법은 영어로 'law'다. 또 규칙은 영어로 'rule'이다. 어설프게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데는 이유가 있다. 법치국가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미국, 그들은 법을 이야기할 때 'the rule of law', 즉 '법의 규칙'을 묶어 이야기한다.
클린턴의 섹스 스캔들. 우리나라같이 정치력이 뛰어난 나라 같으면 적당히 여당, 야당, 출입기자들이 모인 요정에서 결판이 났을 일을 머리가 둔한 미국 의회는 복잡하게 회의를 하면서 길게 길게 해결해갔다. CNN 등을 통해 생방송되던 상원 법사위원회에서 의장은 가끔씩 'the rule of law'를 외쳐댔다.
또 우리보다 더 한심한 미얀마의 정치 현장을 보도하는 가운데 야당 총재가 CNN의 'Q&A' 프로에 나왔다. 거기서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법은 있는데, 그 법을 집행하는 규칙은 없습니다."
그도 역시 'the rule of law'를 외쳐댔다.
어느 나라나 법은 다 있다. 조선시대에도 위대한 법전 '경국대전'이 있었다. 그러나 그 법은 엿이었다. 늘이면 늘어났고 자르면 잘라졌다. 엿장수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법은 있었지만 'rule'이 없었던 거다. 어느 누구에게도 법이 똑같이 적용되는 규칙, 그 규칙이 조선에는 없었고 한국사회에도 없는 것이다.
<p.43>
사회심리학의 변별 이론은 사람들은 특정한 상황 안에서 타인과 자신을 구별함으로써 스스로를 정의한다고 본다. 즉, 나는 무엇이다라고 해서 자신의 정체성이 확립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무엇이 아닌지를 통해 스스로를 정의할 수 있다는 의미다.
<p.73>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동물이며, 스스로 얽은 그 의미의 그물에 구속되는 동물이다."
- 클리포드 기어츠 (미국의 인류학자)
<p.115>
한국인과 중국인은 유난히 역사에 매달린다. 험난한 사건과 문제에 맞닥뜨리기만 하면 바로 과거의 역사 속에서 해답을 찾아보고 비슷한 상황을 꺼내 위안의 말잔치를 풍성하게 차린다. 모든 정답은 과거에 있다는 답답한 문제 해석 의식 때문이다.
"옛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안다(溫故知新)."
물론 때로 과거를 참고할 필요는 있겠지만 동양인들은 이 논리를 천고 불변의 진리로 못 박아버렸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 2,000여 년 이상 중국과 한국의 지식인들은 수많은 해석들을, 아니 억지들을 써왔다. 그리고는 새로운 현상이 나올 때마다 낡은 경전을 뒤적였다. 때문에 이 옛것에 맞지 않는 것들은 가치를 부정당했고, 새로운 것을 주장하는 문인, 지식인들은 경전을 펼쳐대는 지식인들에 의해 매장당해왔다.
새로운 것은 새로운 곳에 있다. 현재보다 낮은 수면에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까지의 언어를 계속하는 한 새로운 미래는 만들어지지 않는 법. 물론 역사 전체를 부정하겠다는 억지를 부리려는 생각은 아니다. 하지만 동양인들, 그리고 한국인의 뇌리에 각인된 '온고지신'의 '뒤돌아보기 문화'는 미래를 지향하는 우리들의 발목을 수시로 붙잡는다. 뭣 좀 해보려는 젊은이들의 발목을 꽉꽉 틀어잡는다. 도저히 앞으로 나갈 수가 없다.
<p.133>
우리 사회는 한번 굳어진 어휘에 대해서는 검증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언어란 변하고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 따라서 시대에 맞는 언어를 늘 새로운 마음으로 골라 사용해야 하는 법. 언어란 사회 공동의 가치를 담는 그릇, 따라서 언어를 새롭게 해석하고 선택한다는 뜻은 바로 사회 공동의 가치를 담을 그릇을 다시 씻고 다시 만들어간다는 유연한 태도를 의미한다.
<p.151>
'정성껏'이라는 말이 대단히 따뜻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것이 우리 사회를 엉망으로 만든 요인 중의 하나다. '성의를 봐서 봐주고', '정성을 봐서 봐준' 결과들이 만든 건 엉성한 조직력이다. 냉정한 프로들의 설 자리를 빼앗는 것이 바로 이 '성의' 문화다.
<p.154>
서구의 양로원을 비웃으며 효도의 가치를 자랑스러워하던 우리 사회의 노인들. 이제 그들의 처지는 한여름 노래를 부르던 베짱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p.156>
이런 점에서, 자신이 꽃이 되고 싶기보다는 열매다 되기를 자처하고 쟁취에 나서는 서구의 여인들, 아시아의 중국, 타이완, 홍콩의 여인들, 그리고 누구보다 빠릿빠릿하고 부지런한 일본 여성의 모습을, 그들의 빠른 경제 성장과 윤택한 생활과 연관 지어 생각하는 것이 무리는 아닐 것이다. 나는 가끔씩 통역일 등으로 타이완, 홍콩, 중국 여자들을 만나는 경우들이 있는데, 그들의 일로써 승부를 하고 일로 평가받기를 원하는 태도는 항상 '어리광'을 달고 다니는 한국 여성들의 모습과 분명히 다른 점이다.
<p.167>
남자들은 여성을 완벽하게 소유하기 위해 여성을 틀어쥐었지만 결국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성을 완벽하게 소유하기 위해 만든 유교의 많은 장치들이 결국은 여성을 죽여버렸다. 유교 속의 여성은 더 이상 인간도 여성도 아니었다. 그것은 왜곡된 생명체에 불과했고 원한으로 뭉쳐진 카오스에 불과했다. 결국 여성들은 폭발해버렸고, 남자들을 떠났다. 원시 속의 순수한 여성을 잃어버린 동양의 남자들은 그래서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있다.
<p.170>
이제 공부를 위한 공부는 끝나야 한다. 그것을 끝내지 못하면 인생이 끝날지도 모른다. 이제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를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 지식을 머릿속에 쑤셔 박는 공부가 아닌 숨은 능력을 끌어내는 지혜를 이야기해야 한다.
<p.240>
나는 한국의 영어 교육이 실패한 이유 중에 가장 큰 이유는 '반드시 써먹겠다는' 의지가 부족한 데 있다고 본다. 선생과 학생 모두가 써먹겠다는 의지와 필요 때문에 영어를 가르치고 익히는 것이 아니라, '관문 통과'를 위해 필요한 대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늘 골치만 아프다.
때문에 교과서는 사용 현장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문법과 어휘에만 중점을 둔다. 또 교과서를 만들 때도 주로 특정 문장을 통해 아이들에게 '도덕적 교훈'을 주겠다는 유교적 '훈수'가 바닥에 깔려 있다. 우리나라 지식인 대부분이 그렇지만 이들은 가르친다는 행위에 반드시 '도덕적 교훈'을 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유교의 교육관과 글을 숭상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통적으로 유교는 말에 대해서는 억제하는 태도를 가졌고, 시나 문장 등의 글 다루기에는 후한 점수를 주었다.
그러다 보니 외국어 학습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의사소통은 무시되고 글 다루기 능력 위주로 교과서가 만들어진다. 또 선생님들은 그것을 가지고 역시 의사소통과는 관련이 없는 단어 스펠링이나 문법 등만을 가르친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가만히 생각해보면 교과서를 만들었던 사람들이나 가르쳤던 사람들 중에 영어를 마음껏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p.244>
이 조기 교육에 대해서는 찬성과 반대의 의견이 만만치 않다. 전문가들도 마찬가지지만 학부모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학부모들을 보면, 찬성론자는 대부분 '여유 있는' 계층들이고, 반대론자는 대부분 '여유 없는' 계층들이다. 사실 반대론자들은 구체적인 데이터나 이론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식들과의 민망한 상황을 조금 해소해보려는 의도에서 '전문가 의견'을 뉴스에서 빌려온 것이 대부분이다.
왜 뉴스는 이런 '전문가 의견'들을 편집해 내보내고 있을까? 뉴스 편집 기자들이나 PD들이 정말 그렇게 영어 교육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일까? 자신의 아이들은 정말 그 소신에 따라 조기 교육을 시키지 않고 있는 것일까? 지나치게 과열되는 영어 조기 교육 열풍을 조금 식혀보려는 '민족적' 사명감 때문에 만들어낸 의도적 '선전'은 아닐까?
나는 그 목적 있는 '목소리'를 따라가다가 결국에는 하수구에 처박히는 처참한 내일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그 '목소리' 주변의 힘 있고, 능력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국민들이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하고 있는 동안 나름의 대비책을 마련하면서 항상 살아남았다. 6.25 때 정부와 이승만은 서울을 버리고 내빼면서도 '서울을 사수하자'라고 외쳐댔다. 그뿐인가? 정부가 우리를 속여먹던 일이. 때문에 그러한 학습 효과가 살아 있는 한, 닥쳐올 험난한 21세기에도 실험실의 흰쥐 꼴이 되고 싶지는 않다.
<p.247>
어린 아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이유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가르치기 위해서다. '어른에 대한 예의'가 아닌 인간에 대한 예의 말이다. 우리 사회는 유교적 수직 윤리로 지탱되는 사회다. 때문에 인사는 반드시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해야 하고 윗사람은 당연히 '에헴'으로 받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이 상황이 깨질 때 윗사람은 분노하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다. (...)
우리는 모든 인간에 대해 예의를 표해야 한다. 그 첫 번째 대상은 자신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들 중에 가장 중요한 인간은 자신이다. 나는 아이 자신이 대단히 중요하고 아빠나 엄마에게서 존경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인사를 하는 것이다. 인간끼리의 존경에는 아빠도 엄마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려고 한다. 눈을 맞추고, 웃는 표정으로 하는 인사법은 신영이에게 큰 능력을 만들어주었다. 모든 사람을 보면 웃고 인사하는 아이가 되었다.
<p.281>
그러나 사실 공부가 그리 피곤한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여전히 즐겁고 활기차다. 그들은 짬짬이 여러 가지 음담패설과 연예인, 선생님, 헤어스타일, 이성 친구들 이야기를 동원해 자신들의 스트레스를 적절히 소화해낼 줄 안다. 자기 조절 능력이 뛰어난 아이들이다. 이런 아이들이 집 안에만 들어서면 왜 갑자기 피곤해지는가?
사실 아이들이 집에만 오면 갑자기 피곤해지는 이유는 본능적인 자기 방어 때문이다. 엄마, 아빠가 할 말이 뻔하기 때문에 듣기 싫다는 의사 표시가 바로 '피곤하다'이다. '나 정말 피곤해'에는 '바로 엄마 말이야!'가 생략되어 있다. 그러나 제 방으로 들어간 아이는 잠시 후 다시 생생해지면서 자기의 세계로 빠져든다.
어떻게 해야 하나? 방법이 있다. 인사를 바꾸어보라.
"사랑한다. 어서 와."
'어서 와'는 '너를 기다렸다', '너는 환영받는 존재야'라는 의미가 숨어 있다. 물론 이런 인사를 어느 날 갑자기 하게 된다면 아이는 순간 닭살이 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싫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인사를 좀더 일찍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그 출발은 아이를 독립된 인격체로, 존경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로서 대하려는 부모의 태도가 전제되어야 한다.
<p.264>
나는 아이의 잘못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벌을 주지만, 그저 단순한 '도덕적 부담감' 때문에 '그래도 선생님 말씀은 무조건 잘 들어.'라고 헛소리를 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아이는 선생님과 동시에 나도 불신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청소년들의 많은 불만 중 하나가 자신들이 분명히 알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어른들이 '얼버무리는 것'이다.
<p.270>
그런데 의외로 아이들 중에는 '마음대로'를 무척 힘들어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 아이들은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언제나 '착한' 아이들로 '인정' 받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그 아이들은 자신들의 '착한' 이미지에 맞게, 그리고 선생님이 좋아하시는 '정답'을 찾기 위해 나의 눈치를 보며 계속 이렇게 물었다.
"이렇게 해도 되요? 이거 그려도 돼요?"
<p.279>
"솔직한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이다."
<p.313>
나는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말은 알고 있었지만 이게 책 제목인 줄은 몰랐다. 더군다나 1999년에 30만 부가 팔리던 베스트셀러였다는 사실은 더욱 몰랐었다. 아마 그때 베스트셀러가 되고 책 제목이 유명세를 끌면서 지금까지도 종종 유교 문화에 대한 비판을 할 때 그 말이 사용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당시 작가는 이 책 제목 때문에 성균관 유림들로부터 고소를 당했다고 한다. 사유는 공자에 대한 명예 훼손이었다. 약 5년 간의 법정 공방 끝에 2005년 마침내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는 하는데 이 사건만으로도 왜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사는지 알 것만 같은 기분이다.
이 책의 작가인 김경일 교수는 열 살 때부터 천자문을 배우고 대학에서도 한문학을 전공했으며 9년 간의 대만 유학을 통해 국내 갑골학 박사 1호가 되었다. 유교 문화를 비판하는 책을 쓴 작가가 오히려 여느 유교 추종자보다 유교에 관해서는 전문가였던 것이다. 나는 이런 점 때문에 작가에 대해 더 신뢰감이 들었고, 자신이 소속된 집단 내부에 있는 사람이 그 집단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 때문에 작가의 용기가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이 책이 쓰여진지도 어느새 22년이 지났다. 2021년, 지금 이 책을 읽어보니 작가가 지적한 부분 중에서는 현실과 맞지 않는 내용도 있고 이미 개선된 것도 있고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도 있었다. 당시 작가의 나이는 40세 정도였는데 책의 내용으로만 보면 지금의 40세보다 더 깨어 있는 생각을 가진 듯하다. 아마 20세기 말 당시에 이 책이 가져왔을 사회적 파장은 무척 컸을 것이다. 작가의 근황이 궁금해서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는데 별다른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지금 나이로는 환갑이 넘었을 텐데 여전히 유교 문화에 대해 비판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을지 아니면 나이가 듦에 따라 생각이 바뀌었을지 개인적으로 궁금하다. 이 시대를 살면서 수직적인 조직 문화, 남성우월주의, 기성세대와의 갈등 때문에 답답한 마음을 가진 젊은이라면 한 번쯤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20년 전에도 이렇게 생각한 사람은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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