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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라 그래 > 양희은, 2021

by Ditmars 2021. 6. 24.

<그러라 그래> 양희은, 2021

 

 방송을 그만두고 노년의 긴 세월 동안 무얼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전유성 선배는 대뜸 그냥 살란다.

 "여행 다녀. 신이 인간을 하찮게 비웃는 빌미가 바로 사람의 계획이라잖아. 계획 세우지 말고 그냥 살아."

<p.37>

 

 그런가 하면 어느 유명한 사진작가의 아버지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그분은 생전에 미리 말씀해두시길, 운구를 실어 나를 때 자기가 남긴 카세트테이프를 꼭 틀어달라고 했단다. 돌아가시고 운구 차량 안에서 테이프를 틀어보니 돌아가신 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야! OO 왔니? OO도 왔고?"

 친구들 이름을 한 사람씩 부르면서, 너희들이 올 줄 알았다며 걸진 입담을 늘어놓고, 추억담과 더불어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셨단다. 생생하게 담긴 고인의 음성 때문에 차 안에 있던 사람들은 감탄과 큰 충격을 동시에 받았다. 사람은 떠났는데 목소리는 이리도 생생하고... 떠나기 전에 친구 한 사람씩 호명하며 남긴 음성 편지라니... 전해 들은 얘기지만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p.57>

 

 작은 돌부리엔 걸려 넘어져도 태산에 걸려 넘어지는 법은 없다고, 뭐 엄청 대단한 사람이 우리를 위로한다기보다 진심 어린 말과 눈빛이 우리를 일으킨다는 걸 배웠다. 세상천지 기댈 곳 없고 내 편은 어디에도 없구나 싶을 때, 이런 따뜻한 기억들이 나를 위로하며 안 보이는 길을 더듬어 다시 한 발짝 내딛게 해준다.

<p.67>

 

 우린 대체 무얼 먹고사는 걸까?

 소고기를 넉넉하게 사 먹었는데도 금세 배가 꺼지고, 김치에 비벼 먹었는데도 배 속이 오래도록 든든한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결국 우리는 어떤 '기운'을 먹는 게 아닐까.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무엇! 집밥 속의 엄마의 정성이나 사랑 같은, 보이지 않는 마음을 먹는 걸까?

 응원이나 격려나 사랑 등 멋진 말이 아니라도 좋다. 식구가 맛있게 잘 먹고, 집밥이 피가 되고 살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내 남편, 내 아내, 우리 아이 먹이려고 만드는 그 마음... 음식에 담긴 그 마음을 먹으면 몸 안에서 피가 되고 살이 되어서 험한 세상을 살아갈 에너지도 되고, 눈에 안 보이는 것들을 더 귀하게 여기게도 된다.

<p.181>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건강을 구했는데, 보다 가치 있는 일을 하라고 병을 주셨다."
 - 양희은이 좋아하는 기도문 중 한 구절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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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양희은 님의 자전적 에세이이다. 1952년 태어난 작가는 우리나라의 격동기를 거쳐 오면서 여러 어려움을 겪었다. 어머니의 양장점이 화재로 타버리는 바람에 집안이 어려워지면서 가난을 겪었고, 어렵게 얻은 기회로 명동의 한 술집에서 노래를 시작할 수 있었으나 그녀의 앨범이 금지곡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이후에는 난소암 진단을 받아 여러 번의 수술과 오랜 투병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인생의 굴곡을 겪으며 그녀는 오랜 기간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가수이자 방송인, 라디오 DJ로서 특유의 당당함과 여유를 보여주며 지금까지 활동을 하고 있다. 

 

 TV를 보다 보면 많은 방송인들이 작가가 자주 하는 말인 "그럴 수 있어", "그러라 그래"를 자기 인생의 좌우명이라고 얘기하곤 한다. 나 역시 이 말을 참 좋아한다. 하지만 내가 이 말을 접한 건 작가로부터가 아니라 오래전 대학 신입생 때 만난 동아리 친구로부터였다. 그 친구는 동아리 내 사람들의 의견이 충돌될 조짐이 보일 때면 특유의 제스처와 표정을 지으며 "그럴 수 있어"라는 말을 하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자칫 기분 나쁠 수 있는 타인의 행동에도, 오랜 시간 털어놓은 내 고민에도, 때로는 혼잣말처럼 본인 스스로에게도 "그럴 수 있다"며 내공이 대단한 무림 고수처럼 본인을 향한 온갖 번뇌를 부드럽게 흘려버리곤 했다. 지금보다 타인의 시선을 더 중요하게 여겼던 어린 시절에 그런 태도를 가질 수 있는 그녀가 참으로 멋져 보였다. 

 

 타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라고들 얘기하지만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사실 이건 타인뿐만 아니라 나를 둘러싼 외부 환경 그리고 때로는 나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다. 나 스스로도 내가 이해가 안 될 때가 있는데 남은 오죽하겠는가. 상대방이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걸 보면, 어떻게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는지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봐도 내 생각이 맞는 것 같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생각하고 있는데 왜 저 사람만 저렇게 생각할까 싶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일으키는 보편의 오류, 상식의 오류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하는 생각과 행동이 옳은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기준에 보편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다. 특히 보편적이라는 것은 언제나 쉽게 변화할 수 있으며 왜곡되기 쉽기 때문에 대중의 상식이 곧 정의라고 속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안타까운 건 요즘 사회에서 이런 일들이 자주 일어난다는 점이다. 인터넷의 발달로 사람들의 소통과 의견 수렴이 실시간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그 속에서 빠른 속도로 주류로 성장한 '상식'에 반기를 드는 것은 쉽지 않다. 문제는 대중의 생각인 것처럼 보이는 그것이 결코 대중의 생각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인터넷 뉴스의 댓글이 그러하다. 누군가 의견을 올리고 그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이 많으면 그것이 상식적인 생각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의 '상식'이 만들어지면 그것을 뒤집기는 참으로 어렵다. 여러 논리와 정확한 사실을 가져와도 이미 확증편향에 빠져 버린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보편과 상식이라는 이유로 일어나는 폭력이다. 

 

 "그럴 수 있어"라는 가볍고 명랑한 말로 시작된 글이 어쩌다 사회 현상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는데 개인주의화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타인의 다양한 생각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 우리의 모습은 이런 사회적 흐름과는 오히려 반대로 가고 있다. 주류의 생각에 편승하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 나쁜 사람이 되는 현실에서 우리는 보편적이지 않은 것, 상식적이지 않은 것에 "그럴 수 없어"라고 얘기한다. 마치 내가 왕따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누군가를 왕따 시키는 일에 동조하는 거나 침묵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이런 현실 속에서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자존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그것은 주류에 있지 않아도, 흔히 말하는 아싸가 되어도 상관없다는 마음이다. 너도 그럴 수 있고, 나도 그럴 수 있는 세상에서 남들 눈치 안 보고 당당하게 살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