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이쯤에서 이야기가 끝났더라면 한 편의 훈훈한 가족영화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생은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법이다. 지루한 일상과 수많은 시행착오, 어리석은 욕망과 부주의한 선택... 인생은 단지 구십 분의 플롯을 멋지게 꾸미는 일이 아니라 곳곳에 널려 있는 함정을 피해 평생 동안 도망다녀야 하는 일이리라. 애초부터 불가능했던 해피엔딩을 꿈꾸면서 말이다.
<p.45>
어릴 때부터 용돈과 학원비로 맺어진 이 기묘한 모녀관계는 얼핏 생각하면 골치 아픈 양육 문제를 돈으로 해결하려는 무지한 부모의 전형적인 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점에선 서로 물고 빨고 핥느라 개인의 인생을 모두 소진시켜버리는 여느 한국식 가족관계보다 더 간편하고 합리적인 면도 있었다.
<p.78>
그녀는 한마디로 기내식 같은 여자였다. 별로 당기지는 않는데 안 먹으면 왠지 손해일 것 같고, 그래서 억지로 먹기는 먹되 막상 먹으려고 보니 뭔가 복잡하고 옹색하기만 하고, 까다로운 종이접기를 하듯 조심스럽게 겨우 먹고 나면 뭘 먹었는지 기억도 잘 안나고, 식후에 구정물 같은 커피를 마시다보면 뭔가 속은 것 같은 기분도 들고, 갖출 건 다 갖춘 것 같은데 왠지 허전하고, 결국 포장지만 한 보따리 나오는 그런 여자였다.
<p.185>
"젖은 자는 비를 두려워하지 않는 법이다."
<p.192>
엄마에게는 아마도 혹독한 세상살이가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시무시한 괴물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래서 끝내는 자식들이 실패한 원인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엄마가 알고 있는 것은 그저 '사람은 어려울 때일수록 잘 먹어야 한다'거나, '몸만 성하면 된다'는 식의 막연하고 단순한 금언들뿐이었다. 그래서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자식들을 집으로 데려가 끼니를 챙겨주는 것뿐이었으리라. 어떤 의미에서 엄마가 우리에게 고기를 해먹인 것은 우리를 무참히 패배시킨 바로 그 세상과 맞서 싸우려는 것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 또한 엄마가 해준 밥을 먹고 몸을 추슬러 다시 세상에 나가 싸우라는 뜻이기도 했을 것이다.
<p.198>
내가 믿기론, 사랑이란 여자의 입장에선 '능력있는 남자에게 빌붙어서 평생 공짜로 얻어먹고 싶은 마음'이고 남자의 입장에선 '자신의 유전자를 가진 아이를 건강하게 낳아 양육해줄 젊고 싱싱한 자궁에 대한 열망'일 뿐이었다. 우울한 얘기지만 그것이 사랑의 본질인 것이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그 모든 사랑 이야기는 대중을 기만하는 사기일 뿐이다.
<p.216>
자존심이 없는 사람은 위험하다. 자존심이 없으면 자신의 이익에 따라 무슨 짓이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위험한 건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사람이다. 그것은 그가 마음속에 비수 같은 분노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자존심을 건드리면 안 되는 법이다.
<p.222>
캐서린에게 몸을 맡긴 채 나는 누군가에게 보호받는 기분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새삼 깨달았다. 그러고 보면 나는 평생 보살핌만 받았을 뿐 누군가를 돌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헌신적으로 나를 보살피는 캐서린을 지켜보며 나는 한 인간의 삶은 오로지 이타적인 행동 속에서만 완성되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돌보고 자신을 희생하며 상대를 위해 무언가를 내어주는 삶... 거기에 비추어보면 나의 삶은 얼마나 이기적이고 불완전한 삶이었던지.
<p.263>
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하지만 삶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법이다. 내 앞에 어떤 함정이 기다리고 있을지 나는 짐작할 수 없다. 운좋게 피해갈 수도 있지만 자칫하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에 대해 미리 걱정하느라 인생을 낭비하고 싶진 않다.
나는 언제나 목표가 앞에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 이외의 모든 것은 다 과정이고 임시라고 여겼고 나의 진짜 삶은 언제나 미래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 결과 나에게 남은 것은 부서진 희망의 흔적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헤밍웨이처럼 자살을 택하진 않을 것이다. 초라하면 초라한 대로 지질하면 지질한 대로 내게 허용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내게 남겨진 상처를 지우려고 애쓰거나 과거를 잊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겠지만 그것이 곧 나의 삶이고 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p.286>
영화 감독이지만 흥행에 실패하여 빈털터리가 된 50대의 주인공이 엄마 집으로 들어오면서 백수인 형과 이혼당한 여동생 그리고 그녀의 중학생 딸까지, 이렇게 졸지에 5명이서 오래되고 좁은 빌라에 같이 살게 되면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쉽고 재미있어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소설의 내용과는 크게 관련이 없지만 최근에 유사가족이라는 단어를 접했다. 검색해보니 아직 개념이 완전하게 확립되진 않은 듯하다. 유사가족은 단어 그 자체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은 아니지만 가족 같은 유대 관계를 지닌 사람들이 가족처럼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내겐 이 말이 조금 이상하게 들렸다. 가족 같은 사람들이 가족처럼 살고 있는데 가족은 아니고 가족과 유사한 것이라니... 그러니까 가족은 혈연으로 이어진 관계로만 한정되기 때문에 혈연관계에 있지 않은 사람끼리는 절대 가족이 될 수 없고 대신 가족과 유사한 것이 된다는 뜻 이리라.
하지만 우리는 이미 가족이라는 단어를 혈연 관계가 아닌 경우에도 많이 쓰고 있다. 가족 같은 분위기, 가족 같은 사람, 가족 같은 회사... 모두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들이다. (띄어쓰기에 유의해서) 이미 가족이라는 단어가 혈연으로 이어진 것 못지않게 끈끈한 인간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범위가 확장되었다. 따라서 혈연 유무로 가족을 나누고자 할 때 '가족/유사가족'보다는 차라리 '혈연 가족(혹은 친족)/가족'으로 나누어 사용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피를 나누지 않았어도 피를 나눈 가족처럼 살고 있다. 혹은 그렇게 살아 본 경우가 있다. 앞으로는 비혼 주의자, 1인 가구, 룸메이트, 동성 결혼 등 다양한 가족의 형태가 더 많아질 것이다. 이들을 유사가족이라고 부른다면 그들은 영원히 가족이 될 수 없고, 기껏해야 가족과 유사해지는 것에 그치지 않을까.
끝으로 아래는 내가 2018년 같은 책을 읽고 네이버 블로그에 남겼던 글이다. 기록해두고 싶어서 여기에 남긴다.
<고래>는 내가 처음 접한 천명관 작가님의 소설이다. 내가 고등학생일 무렵 읽었으니, 어느새 10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버린 일이다. 시간이 너무 흘러버려서일까, 내용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건 책이 꽤 두꺼웠고, 어촌을 배경으로 했으며, 엄청나게 뚱뚱한 여자가 나왔다는 점 정도이다. 마지막의 엄청나게 뚱뚱한 여자가 나왔다는 걸 기억하는 이유는 당시 그 부분이 내게 꽤 충격으로 다가 왔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우울한 분위기의 소설로 내겐 남아 있다.
이후 <고령화 가족>은 내가 두 번째로 읽어 본 천명관 작가님의 소설이다.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유쾌했고, 스토리의 진행이 너무 좋아 단숨에 한 권을 다 읽었다. 일본 소설을 한창 읽었을 때도 느낀 점이지만,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인물을 설정하고, 또 그 인물들끼리의 관계를 엮어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참 신기하다.
사람들은 인생의 목표를 떠올릴 때 행복한 삶이라고 말은 많이 하지만, 삶 자체에서 행복을 느낀다기보다는 삶에서 이루어내는 어떠한 결과를 통해 행복을 느끼는 것 같다. 쉬는 날 소파에 앉아 가만히 텔레비전을 보는 시간을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겠지? 그러나 그렇게 보낸 시간을 아까워 하며 그 시간에 취미 생활을 즐기거나 밖에 나가 누군가와 대화를 하길 바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데, 흐르는 시간 자체에 행복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에 따라 그 사람이 느낀 행복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살고 있다는 자체에 큰 의미를 두면 행복은 참으로 소소한 것이 될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이런 생각을 해 볼 겨를이 없었다. 학교에서 알려주지도 않았다. 학교에서는 수능만 끝나면 좋은 날이 올 거라고만 계속 얘기해줬지. 그래서 소설 중 주인공의 말처럼 나는 행복이 목표를 이루는 것이라고 배웠고, 목표를 이뤄가는 삶은 과정 또는 임시라고 알고 있었다. 그 관성으로 나는 지속적으로 특정 날, 특정 사건을 목표 하여 살고 있는 것만 같다. '며칠 뒤에 있을 그 날이 정말 기대돼, 그 일이 끝난다면 난 정말 행복할 거야.' 와 같이 말이다. 그리고 그 날과 그 사건까지의 삶은 마치 얼른 지나갔으면 하는 시간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시간들로 여겨지는 것 같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당시에는 우유 급식을 했기 때문에 방학을 하기 전에 방학 기간 중에도 우유 배달을 받을 것인지에 대한 가정통신문을 집으로 보냈다. 그 가정통신문에는 우유를 총 몇 개씩 몇 주 동안 받을 것인지에 대한 신청과 일반우유, 초코우유, 딸기우유 중에서 고르는 신청이 있었다. 어머니는 우리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여 초코우유를 신청해주셨다. 초코우유는 매일 아침 두 개씩 방학 기간 중에 배달이 되었고, 다음 날이 주말이면 주말 치의 우유까지 한 번에 하루에 배달되었다. 매일 아침 배달되는 초코우유를 나와 동생이 한 개씩 마실 수 있었는데, 이 초코우유를 언제 먹을 것인가는 당시 최고의 고민이었다. 배달이 되자 마자 마셔버리면 그 당시에는 너무 맛있고 좋지만 또 초코우유를 마실 수 있기 까지는 꼬박 하루라는 시간이 걸렸다. 알다시피 초등학생의 하루는 무척 길다. 그렇다고 마냥 아껴두기에는 초코우유의 달콤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 고민은 금요일 아침 주말치까지 포함하여 총 3개의 초코우유가 배달되었을 때 가장 극대화 되었다. 다 마셔버릴 것인가, 참을 것인가! 지금 생각해보니 거의 한국판 마시멜로 실험 같다.
그 때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저녁이 되면 다음 날 아침의 초코우유를 기다리며 일찍 잠이 들려고 노렸했고, 다음 날 아침에 초코우유를 마시며 행복해했으며, 초코우유를 다 마시면 또 내일 아침에 배달될 초코우유를 기대하며 얼른 오늘 하루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성인이 된 지금 매일 아침 배달되는 초코우유는 없다. 그러나 내 삶은 내일의 초코우유만 기다리면서 하루를 보낸 그 때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초코우유만큼이나 매일 아침 초코우유를 마실 수 있는 삶에 대해 감사하며 행복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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