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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멋진 달 > 엄진, 2017

by Ditmars 2021. 7. 15.

<어느 멋진 달> 엄진, 2017

 

 예전엔 헤어지는 모든 순간이 아쉽기만 했다. 하지만 포착되지 조차 않은 그렇게 작별인사도 없이 맞은 이별이 사실은 얼마나 많았을까.

<p.42>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강조하며 역할, 영역을 구분하는 것은 단순한 진술 같지만 이러한 '구별'은 쉽게 차별과 폭력의 근거로 활용된다. '여성은 아름다운 존재이기에', 여성을 꽃이나 다이아몬드 비유하면서 '지켜주기 위해'라는 모든 여성을 우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말들 역시 마찬가지다. 여성을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인식이기 때문이다.

<p.45>

 

 도덕책이 무의미한 세상 같다. 옳다고 믿었던 것들, 어떻게 해야 한다고 배웠던 것들을 지키는 것이 오히려 손해가 되는 순간들 때문이다. 하나라도 더 가지려 애쓰지 않으면 내 것까지 잃고 마는 무한경쟁시대에 살고 있으니까. 세상은 원래 아름답고 행복한 곳이 아니라는 회의가 들 때가 많다. 순진한 이상주의자들은 수없이 좌절하고 불행해진다.

<p.58>

 

 나만을 위해 이기적으로 살다가도 정의에 눈뜨고, 타인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되는 시간이 찾아온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간디가 가르쳐준 것은 엄청난 희생이 아니다. 내가 옳다고 믿는 아주 작은 원칙과 실천이라도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는 사소한 진리이다. 그렇게 우리는 누구나 간디처럼 세상을 바꾸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p.62>

 

 모든 의미는 그 시대의 사회, 문화적 맥락 속에서 만들어진다.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잠정적으로 여겨지는 진리를 맹목적으로 믿으며 다른 생각과 삶을 파괴하려 든다면 그만큼 어리석고 폭력적인 것도 없을 것이다.

<p.69>

 

 영원한 이방인으로 떠돌며 산다는 것이 서럽고 외로웠을지 몰라도 그들의 자유가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어디로든 떠나고 싶어도 용기도 없고, 살 자신도 없어 발이 묶인 듯 살아가는 요즘의 사람들 잃을 것도 없다 싶다가도 한 줌 쥐고 있는 욕심을 놓지 못해 전전긍긍하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우리의 일상을 생각했다. 어떤 체면도 명분도 차리지 않고 본능에 이끌려 춤추고 노래하며 바람같이 구름같이 사는 이들의 대책 없음이 부러웠다.

<p.118>

 

 이렇게 많은 것이 빠르게 변해버리는 세상에서 변화하는 것만큼이나 변치 않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생각한다.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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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작가가 대학원을 다니던 중 방학을 이용해 인도와 유럽에 각각 한 달씩 여행을 다녀온 이야기이다. 작가는 대학을 졸업한 뒤 이른 나이에 방송 기자가 되었다가 자신과 삶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면서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여행기의 생생한 경험 속에서 이십 대 후반을 지나는 그녀의 삶에 대한 고민과 여성학 전공자로서 바라보는 사회에 대한 고민을 엿볼 수 있었다.  

 

 이 책은 POD 도서이다. POD는 Publish On Demand의 약자로 출판사가 책을 파일 형태로 가지고 있다가 주문이 들어오면 그때 책으로 만들어 판매를 하는 소량 출판 방식을 의미한다. 따라서 일반적인 서점이나 도서관에서는 이 책을 쉽게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 책을 알게 된 계기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 이미 이 작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에 입학하여 입대 전까지 동아리 활동을 했었는데 그 때 이 작가를 알게 되었다. 작가는 나보다 나이가 한 살, 혹은 두 살 많았던 누나였다. 우리 동아리는 서울의 여자대학과 연합하여 활동하였는데 누나는 당시 내가 상상하던 여대생의 이미지에 거의 완벽히 부합하는 사람이었다. 발랄하고 매사에 긍정적이었던 누나는 때로 어색한 기류가 흐르던 동아리 분위기까지 밝게 만들고는 했다. 군 전역 후에는 더이상 동아리 활동을 하지 않아서 대부분의 사람들과 연락이 끊겼는데 누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실 동아리 활동을 하던 중에도 내게 누나는 동아리의 여신 같은 존재로 느껴졌기 때문에 많이 친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흐른 뒤 어느 날, 바꾼 핸드폰의 카톡에 갑자기 새로운 친구들이 많이 떴다. 그때 실명이 아닌 이 사람은 누구지? 하고 프로필 사진을 넘겨보다가 이 책의 표지를 보게 되었고, 표지에 적혀 있는 작가 이름을 통해 그 사람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반가운 마음에 그날 바로 책을 구매하였다.

 

 사람의 인생을 놓고 봤을 때 여행 가기 좋은 시기라는 게 있을까? 나는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대학생이었던 사촌 형을 따라 열흘 정도 유럽으로 패키지여행을 간 적이 있었는데 대학생이 되고 난 뒤에는 그 여행을 떠올리며 종종 후회하곤 했다. '그때 그 돈을 놔뒀다가 대학생 되고 나서 갈 걸...' 하고 말이다. 열흘 간의 유럽 여행은 적지 않은 돈과 시간이 소요되는데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너무 어렸기에 충분한 재미와 감동을 느끼지 못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이라는 류시화의 잠언 시집의 제목처럼 말이다. 대학생이 되면서 나를 둘러싼 세상이 180도 변하고 성격과 가치관 등이 많이 변한 경험을 한 당시의 나로서는 그렇게 생각했을 법도 하다.

 

 그러나 지금 와서 그 여행을 생각해보면 결과적으로는 매우 잘 갔다 온 여행이라고 할 수 있겠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인셉션>이라는 영화를 보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림보에서 탈출하기 위해 아내에게 '여기는 꿈 속이고 바깥세상이 현실이야'라는 생각을 심어놓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장면처럼 고등학생 때의 여행은 내게 '나중에 조종사가 되고 싶다'라는 생각을 심어놓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아내의 무의식 깊은 곳에 몰래 심어놓은 그 생각은 현실에 와서도 줄곧 그녀를 괴롭히며 결국 그녀를 자살로 이끄는 비극이 되었다. 그러나 내게 심어진 생각은 내면의 목소리가 되어 내가 인생의 항로를 헤매는 순간마다 내비게이션처럼 조종사의 길로 이끌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너무 어려서 혹은 준비를 완벽하게 하지 못해서, "이번 여행에서는 얻은 것이 없는 것 같아"라고 말할 수 있는 여행은 없는 것 같다. 여행을 통해 새로운 환경에 나를 가져다 놓는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땐 그 여행이 내게 어떤 생각을 심었는지, 앞으로 나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모를 뿐이다.

 

 이 책을 읽으며 인도와 유럽, 두 달 간의 여행이 작가의 머리와 가슴 속에 심어놓았을 작은 변화의 씨앗을 떠올렸다. 여행을 할 때, 책을 쓸 때의 그녀는 미처 알지 못했을 작은 씨앗. 그리고 그 씨앗도 내면의 목소리가 되어 불투명한 미래를 향해 걸어가는 그녀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