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모든 게 제법 능숙해진 나이를 살고 있다.
어떻게든 버티면서 나약함을 숨기고, 모르는 것도 마치 아는 것처럼 넘길 수 있는 요령도 생겼다. 짐짓 어른인 척할 수 있는, 인생 화장술의 대가라고나 할까. 하지만 지금도 철벽 같은 세상에 부딪혀 위태로울 때가 많다. 그럴 때면 나는 다시 스무 살, 캠퍼스의 벤치로 돌아간다. 갑자기 떠안아야 했던 세상에 대한 혼란과 무너져버린 집안. 그것들이 영원할 것 같다는 불안과 두려움. 이제는 이 감정들이 내 나이만큼이나 무겁고 깊어진 채로 나를 응시하고 있다. 내 앞에 남아 있는 삶에 대한 채무감만큼이나 두렵고, 복잡해 보이는 눈빛이다.
이럴 때면 나는 크라잉 넛의 음악을 다시 찾아서 듣는다. "쓸데없이 진지해져봤자 폭망한다." 이 말 한마디가 듣고 싶어서.
세상이 쉽게 바뀌지 않는 것처럼, 나는 여전히 구제불능인가보다.
<p.72>
그러니까 요지는, 가드를 바짝 올리고 견뎌내야 한다는 것이다. 견뎌내는 와중에도 입가에는 묘한 웃음을 띄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잔뜩 겁먹은 표정을 해서는 삶이라는 상대가 만만하게 보지 않겠는가 말이다. 설령 바닥까지 떨어진다고 해도 우리가 끝끝내 사수해야 할 최후의 보루, 그건 삶에 대한 애정으로부터 배어 나오는 따스한 유머 감각일 것이다.
<p.77>
여기, 두 가지의 음악이 있다. 낭만과 서정의 음악이다. 전자의 효과는 빠르고 직접적이다. 마취제처럼 우리의 감성에 곧장 작용해 "걱정하지 마, 잘될 거야."라며 달콤하게 속삭인다. 그런데 사실 이 험난한 세상에 그리 쉽게 잘될 리가 있나.
거짓 위로요, 상업주의의 극단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낭만의 음악은 '긍정주의'를 음악적으로 전이한 버전이라는 점에서 지극히 위험하다. "천 번은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 따위의 사탕발린이나 매한가지인 것이다. 아니, 천 번을 흔들리면 공황이 온 거나 마찬가지인데 그걸 왜 "나는 청춘이니까 괜찮을 것"이라고 되뇌면서 일방적으로 참아내야 하나. 지금처럼 아픈 세상을 만든 건 이십 대가 아닌 기성세대의 책임이다. 그런 세계가 반강제적으로 주어진 마당에 당사자들을 향해 참고 견뎌라?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이 낭만의 층위를 지나 존재하는 것. 이게 바로 서정의 음악이다. 나는 조금 전에 이소라 음악의 정수가 '아픔을 아픔으로 달래 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앞서도 말했듯이 긍정의 음악은 아픔을 마취시켜 잊게 해 준다. 현실이 아닌 환상을 제공하는 것이다.
서정의 음악은 그렇지 않다. 서정의 음악은 듣는 이들에게 아픔을 직시하라고 말한다. 아픔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아픔을 어떻게든 끌어안고 그것을 견뎌내면서 살아가는 게 우리네 인생이라고 얘기한다. 그러니까, 마취제가 아닌 각성제로써의 음악이다.
<p.108>
사람들은 비평이라는 말을 들으면, 바로 판단이라든가 이성이라든가 냉안이라든가 하는 단어를 떠올리지만, 그와 동시에 애정이라든가 감동을 비평과 동떨어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비평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 평론가 고바야시 히데오
<p.130>
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나는 젊었고, 내가 누구인지, 누가 되고 싶은지 자신도 몰랐기 때문에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의미심장한 역설이다. 언뜻 보면 위의 문장들은 이십 대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오마주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자세히 곱씹어보면, 이보다 더 절망적일 순 없을 문장들이다.
그러니까, '모른다'는 것이다. 그저 무지한 상태로 그 시간을 어떻게든 견뎌내고 통과해야 한다는 것. 그러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새에 어른이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것. 청춘은 가능성 따위가 아니다. 청춘은 차라리 그 자체로 희망고문에 가깝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더욱더.
<p.186>
'포스트 서태지'로 수많은 후배들이 논의되었던 것,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가요계는 여전히 서태지만 한 파급력을 지닌 뮤지션을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눈길을 해외로 돌려보면 상황은 매한가지다. 그쪽 음악 신에서도 커트 코베인의 이후는 전무하다. 음악계에서도 거대 서사의 죽음이 도래한 것이다. 이렇듯 2000년대 이후 전 세계 대중음악계는 전면전이 아닌 국지전의 양상으로 전개된 지 오래다.
이건 어쩌면, '어른 되기'의 강박이 사라진 뒤의 공백이 아닐까. 더 이상 십 대와 이십 대들은 '어른 되기'의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어른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그렇게 달라지지 않을 미래'를 마침내 인정하는 것이다.
과거에 사람들은 미래가 보이질 않아서 불안해했다. 그러나 요즘에는 미래가 너무 뻔히 보여서 불안해한다. 이렇게 죽어라 공부해봤자 내 미래는 잘해야 대기업의 사원 정도나 될 거라는 현실. 실존에 대한 고민은 사라지고, 생존이라는 인간의 본질에만 더없이 충실해질 수밖에 없는 현실. 이런 와중에 (그것이 비록 평론가들에 의한 펌프질일지라도) 한 시대를 압축해서 전시하는 노래나 뮤지션 따위, 등장할 리 만무한 것이다.
단언컨대, 그것이 비록 허상일지라도 넥스트 서태지는 없다. 무한한 청춘의 가능성을 찬양하는 노스탤지어적 정서 역시 폐기 처분된 지 한참이다. (그것이 비록 팔아먹기 위함일지라도) 청춘이라는 소재를 포장조차 할 수 없는 시대. 그러니까, 청춘이 곧 어른이 된 시대. 우리의 각박한 21세기는 이렇게 진행되고 있다.
<p.189>
어떤 음악은 특정한 맥락 속에서 '괜히 들었다'는 후회를 남기기도 한다. 사람들은 무너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음악을 기어이 찾아서 듣는다. 아마도 이건 일종의 자기 증명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헤어짐 뒤에도 나는 여전히 '좋은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자기증명 말이다. 그건 그저 나약한 행동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음악이 간절해지는 순간, 누구에게나 몇 번쯤은 있지 않은가. '어제 만난 슈팅스타'가 미치도록 다시 보고 싶은, 그런 순간.
<p.209>
"아마추어가 영감을 찾아 헤맬 때 프로는 일하러 나간다."
<p.231>
배순탁 작가의 청춘과 음악에 대한 자전적 에세이다. 작가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기본적으로 착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주변에서 음악 좋아하는 사람이 나쁜 사람인 경우는 별로 없었다. (지나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작가의 청춘 얘기를 들으면서 공감이 된 부분이 많았다. 무엇보다 청춘의 시간에 음악으로 도피를 하거나 음악으로 위로를 받은 점이 그러했다. 청춘의 시간이라고 하니 뭔가 좀 이상하긴 하지만 (누군가가 보기에는 지금의 나도, 지금의 배순탁 작가도 청춘이라고 할 수 있기에) 한창 고민 많던 십 대부터 이십 대 시절까지를 청춘으로 보자. 그 시절 소리바다를 항해한 사람 중 하나인 나도 여러 장르의 음악에 빠져 늘 이어폰을 끼고 다녔다. 어떻게 보면 한 가정의 가장이자 직장인이 된 지금이 해결해야 할 문제나 고민해야 할 것들이 더 많은데 그때는 왜 그렇게 머릿속이 복잡하고 생각할 일들이 많았을까. 연애, 인간관계, 학업, 진로 등 하고 싶은 대로 편하게 했어도 됐을 텐데 매사 걱정이 너무 앞섰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그게 맞는 말일 수도 있다. 변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청춘일 때 삶의 변화의 가능성이 많았기에 더 많은 고민을 한 것이 아닐까. 지금의 나의 삶은 큰 변화가 없다. 가정에서의 내 위치, 사회에서의 내 위치는 한동안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더 이상 예전처럼 절실한 마음으로 음악을 듣지 않는다.
청춘은 시대를 타고난다는 생각을 한다. 80년대의 청춘은 민주화 운동에, 90년대의 청춘은 자유와 반항에 자신들의 황금기를 바쳤다. 그것이 그 시대를 타고난 청춘의 운명 같은 것이라고 하면 너무 과한 말일까. 내가 속했던 2010년대의 청춘은 무엇에 시간을 바쳤을까. 대학교 때 놀던 세대와 공부하는 세대의 낀 세대 정도였던 우리는 노는 것도 공부하는 것도 애매했다. 대학생활을 100% 즐긴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공부와 취업 준비에 올인한 것도 아니었다. 적당히 놀고 적당히 공부했다고 하면 될까. 졸업할 즈음엔 취업난의 서막이 열리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지금 보면 다들 잘 되어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전 세대들의 청춘을 부러워했다. 대학교는 대충 다니고서도 대기업에 입사할 수 있었던 그 시절들을 말이다. 그리고 마치 우리가 이전 세대들의 청춘을 두고 부러워했던 것처럼 지금 2020년대의 청춘은 우리의 청춘을 부러워한다. 견고하다 못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하는 취업문, 거의 2년이 되어가는 코로나 바이러스, 급등한 부동산 가격, 남녀 갈등, 일확천금을 노리는 코인과 주식 열풍... 2020년대의 청춘이 처한 현실이다.
이런 점에서 보았을 때 나는 청춘들은 잘못이 없다고 생각한다. 우연히 그 시대를 타고나게 된 것이 어떻게 그들의 잘못이 될 수 있을까. 세상이 그렇게 변한 데 그들이 기여한 바는 0에 가깝다. 그래서 급속한 사회적 변화 속에서 한 끝 차이로 누군가는 취업을 하고, 누군가는 집을 사면서 그 둘의 사회적 격차가 크게 벌어지는 지금의 모습이 참 안타깝다. 이전 세대가 취업을 하고 집을 샀던 건 그들이 지금 세대보다 더 잘나서가 아니다. 취업 준비를 더 열심히 했거나 부동산 투자 공부를 더 열심히 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저 그들은 그들의 생애 주기에 맞춰 취업할 때가 되어 취업을 하고, 결혼할 때가 되어 결혼하고, 집을 살 때가 되어 집을 샀을 뿐이다. 그들은 그저 그게 가능했던 시대를 타고난 청춘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의 청춘들에게 "그러게... 더 열심히 좀 하지." 라거나 "그러게... 그때 집을 샀어야지." 같은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득들이 마치 우리가 열심히 했기 때문에 얻은 것이라고 착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솔직히 돌이켜 생각해보면 우리는 지금 세대만큼 노력하지 않았다. 그저 우리는 운이 좋았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잘 된 것이 우리가 잘했기 때문이 아닌 것처럼 지금 힘든 것 역시 2020년의 청춘 탓이 아니다.
무언가 잘 되지 않을 때 외부 환경을 탓하면 개선의 여지가 없기에 희망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대부분 내부, 즉 나 자신을 탓한다. 나 자신은 내가 노력하면 개선될 수 있으니까. 그러면 없던 희망도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다들 자기 탓을 한다. '내가 부족해서...', '내가 그때 결정을 못 내려서...' 하고 말이다. 동시에 내가 더 열심히 하면 잘 되겠지, 라는 희망을 품는다. 그렇게 가혹하게 자기 착취를 시작한다. 하지만 그 결과로 남게 되는 건 자기혐오와 우울감이다.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순간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누구라도 말을 해줘야 한다. 지금 그대들이 힘든 건 절대 그대들이 못나서도, 열심히 하지 않아서도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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