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라져가는 나
내 안에 있던 진짜 나는 이미 사라져가고 있고, 사라진 만큼 이런저런 덩어리들로 채워져 있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언제부턴가 진짜 나는 거의 소실되어버린 건지도 모른다.
도화지는 위에 그림이 있는 없든 도화지 자체로서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무언가로 채워져 있던 어떤 공간이 다른 덩어리들로 채워지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원래의 것은 있을 자리를 잃고 만다.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죽을 때까지 아주 조금씩 나 자신을 침식당하는 것이 아닐까. 작은 영향들이 모여서 큰 덩어리가 되었고 그것들에 의해 밀려나는 나 자신을 조금씩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진짜 나라는 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내 생각과 언어가 완전한 내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p.20>
sputnik tornado
<스푸트니크의 연인>에서 하루키는 사랑에 빠지는 것을 드넓은 평원을 곧장 달려가는 격렬한 회오리바람 같다고 표현한다. 사랑에 빠지는 시점에 대해서라면 그렇겠지만, 어떤 사랑에서든 회오리는 잦아들기 마련이고, 이를 지나 원숙한 시기에 접어들면 회오리와는 전혀 다른 반대의 성격을 갖게 된다. 이를테면 가만히 명상을 하거나 가부좌를 트는 것과 같다. 맑고 조용한 날들뿐만 아니라 세차게 비가 오는 날에도, 정신없이 분주한 시장바닥에서도, 기계들이 거칠게 돌아가는 공장 안에서도 평정과 균형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하는 행위인 것이다. 모든 것을 휩쓸고 부수고 지나갈 만큼 격렬했던 회오리바람은 도리어 훼방꾼으로 변모하여 찾아온다. 그 속에서 꾸준히 나의 태도를 가다듬고 평원 위의 튼튼한 버팀목이 되는 것 또한 사랑일 것이다.
<p.21>
paradox
삶이라는 각자의 광활한 저수지 안에서 우리 마음은 메말라있었고, 채우려고 하면 비워지고 비우려고 하면 채워졌다. 가득 채운 듯이 으스대는 사람의 삶은 거의 텅 빈 것처럼 보였고, 텅 비운 듯이 담담한 사람의 삶은 오히려 가장 안정적으로 가득 채워진 것처럼 보였다.
<p.29>
여백
하루라는 시간이 책의 한 페이지를 넘기듯 스르륵 지나간다. 밤이 되면 하루의 여백을 버리지 않고 차곡하게 모았다. 일주일의 끝에는 너를 만나는 하루가 기다리고 있었다.
겨울의 여백이 봄으로 서서히 칠해지듯, 그 하루동안 나의 여백은 너로 칠해질 것이었다.
<p.52>
성숙해진다는 것
성숙해진다는 것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과 이성의 첨예한 대립 속에서 그들의 입장 차이를 줄이기 위한 협상과 중재를 원만하게 해내는 것이다. 감정과 이성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협상은 없다. 감정에게 몇 걸음 양보하게 하는 것이 보통이다. 언변이 뛰어난 이성에게 감정은 자주 진다. 감정은 속 좁게 미련을 담아두고 이성은 뻔뻔하게 승리감에 도취된 채 기고만장한다. 가끔 감정의 미련이 폭발할 때도 있지만 이성은 한결같이 뻔뻔하다. 결국 감정의 주장은 협상과 중재가 소용없어질 정도로 무뎌지고 무뎌진다. 성숙해진다는 것은 어쩐지 씁쓸한 일이다.
<p.57>
어쩌면 이러한 점 때문에 우리는 사랑의 본질을 오해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정신적인 행위다. 주체의 의지에 의해 생겨난 마음의 태도가 관념적으로 형상화된 것이 바로 사랑인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객체의 존재 여부와 관련 없이 주체의 내부에서 단독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사랑이란 것은, 반드시 누군가를 사랑해야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 자체만으로 독립적인 존재로서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느끼는 것은 어떤 운명적인 힘에 의해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자기 행위의 방향성을 자기 의지로 표출하기 때문이라는 것. 그러므로 사랑은, 전달보다는 발산에 가까운 행위라고 생각한다.
<p.66>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을 거듭하다 보면 결국 나 자신에 대한 확신으로 채워야 할 공간을 마주하게 된다. 부족한 것은 능력도 책임감도 아니었다. 가장 부족한 것은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다. 나의 중신에 존재하는 확신의 방을 가득 메우면, 모든 망설임이 사라지고 비로소 분명한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p.75>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는 우리의 체계는 서로 제각각이고 어떤 한 사람이 보유한 체계 또한 매 순간 성장하고 변화한다. '완전히 동일한 생각'이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것이 존재한다고 해도, 언어로 표현하게 되면 결국 서로 다른 문장으로 적히기 마련이다.
두 사람이 완전히 동일한 문장을 읽고 그 안에 담긴 생각을 받아들일 때도 마찬가지다. 소통이란 실은 추측과 왜곡이 난무하는 현상일 뿐이다. 의도와는 상관없이 필연적으로 오해가 발생하기 때문에 말과 글을 표현하는 일은 항상 조심스러워야 한다.
<p.81>
내일의 나에게 말 걸기
과거에 써놓은 글을 꺼내 읽어보면 그동안 내가 얼마나 변화했는지를 느낄 수 있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느껴지는 순간적인 위화감과 비슷하다. 거기에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낯선 자아가 담겨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변한 것인지는 파악할 수 없지만 무언가 달라졌다는 사실만큼은 확연하게 느낄 수 있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에게 타자다. 과거에 내가 쓴 글을 읽으면 내가 아닌 누군가와 하나의 주제를 놓고 의견을 주고받는 듯한 기분이 든다. 공감과 반감이 교차한다. 글을 쓰는 것은 나와의 대화를 시도하는 행위다. 내가 쓴 글은 시간이 흐른 뒤 타자가 되어 나에게 말을 건다. 오늘의 생각을 글로 기록하는 것은 내일의 나에게 말을 걸기 위한 것이다. 그 글을 다시 읽어봄으로써 우리는 그 대화에 응할 수 있다.
<p.105>
가까운 것과 두터운 것
가깝지만 두텁지 못한 관계라는 게 있다.
사랑하는 것과 이해하는 것이 별개인 거처럼, 가까운 것과 두터운 것은 별개다. 가까울수록 도리어 무신경해지기 마련이다. 무신경하다는 것은 곧 공감의 필요성을 잃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무신경한 상태가 고착되면 사이에 벽이 생긴다. 벽은 먼 관계보다 가까운 관계에서 더 큰 단절감을 가져온다. 외부적 충격으로 벽을 허물 수는 있겠지만 단순히 벽을 허무는 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내면으로부터 시작되는 내부적 충격을 계기 삼아, 그 고통을 정면으로 감내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점차적으로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
우리가 더욱더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사람은 바로 가장 가깝지만 두텁지 못한, 가족들이다. 매번 이렇게 마음이 행동을 따라가지 못한다.
<p.129>
아내가 이 책을 주문했다. 배송 받고 포장을 뜯었을 때는 무슨 이런 책을 샀냐고 얘기했다. 그도 그럴 것이 책이 일단 너무 작았다. 핸디북이라고 일부러 사이즈를 작게 출판하는 책이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런 책은 보통 고전들을 재출판하는 경우에나 해당한다고 생각했다. 작가가 누구인지도 모르겠고 얼핏 페이지를 넘겨 봤을 때 무슨 내용인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그 책은 나에게 그리고 심지어 아내에게조차 잊혀졌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내가 이 책을 다시 읽어보게 된 계기도 이 책이 작은 사이즈의 핸디북이었기 때문이었다. 몇 달간 아이 책꽂이에 방치되어 있었던 이 책을 다시 집어 들게 된 건 아이와 놀아주는 데 내 정신력의 한계가 왔을 무렵이었다. 뭔가 정신을 돌릴 만한 곳이 필요했다. 아이가 자동차 놀이에 흠뻑 빠져 혼자 놀고 있는 잠깐이나마 나도 내 정신을 환기시키고 싶었다. 그때 비스듬히 기대고 있던 아이 책꽂이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그 뒤로 나는 짬짬이 이 책의 페이지를 넘겼다. 몇 페이지 읽다가도 아이가 아빠를 부르면 다시 덮어버리기 일쑤였지만 책이 작았고 내용이 간결하고 짧은 에세이였기 때문에 읽는데 무리가 없었다. 그렇게 짬짬이 한 권을 다 읽고 나서는 나중에 시간을 들여 한 번 더 읽었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의 아무 생각이나 적은 별 의미 없는 책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나의 오만한 생각이었다. 어느 누구에게나 진지한 고민과 자아 성찰의 시간은 있고 그것을 글로 기록한 것은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더군다나 그것들을 묶어 책으로 낼 정도라면 말이다. 한 사람이 보낸 여러 날의 진지한 밤의 흔적과 고민 끝에 써 내려간 생각과 단어는 비록 그 사람이 유명인이 아닐지라도,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있지 않을지라도, 좋은 출판사에서 선택한 책이 아닐지라도 일어볼 만한 것이다.
글을 쓰기 위해 이 책과 작가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았더니 작가에 대한 정보는 전혀 없었지만 이 책이 다시서점의 청춘문고 시리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서점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정말 다양한 개성을 가진 인디 (이것도 인디라고 할 수 있겠지?) 작가들의 책이 많았다.
'와... 어디서 누군가는 이렇게 책을 쓰고 있었구나.' 내가 그 홈페이지에서 느낀 생각이다. 모두가 전업 작가는 아니었기에 누군가는 자신의 일을 하면서도 시간을 쪼개 자신의 생각을 글로 적어보고 책으로 내는 실천까지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언젠가 나도 책을 한 번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언젠가는 절대 지금은 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나중에 시간이 아주 많아지는 시기가 되면 그때 느긋하게 써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가지고 있던 막연한 생각이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다시서점에서 판매하고 있는 책의 주제는 정말 다양하였다. 그만큼 다양한 책 표지와 다양한 책 제목이 있었다. 새로운 책 세상이 궁금한 사람은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다시서점은 지금의 나와 가까운 방화동에 위치하고 있다. 언젠가 시간이 나면 한 번 들러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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