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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 > 사이토 다카시, 2009

by Ditmars 2022. 6. 9.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 사이토 다카시, 2009

 

 중세라는 가사상태가 지속되는 가운데 서양은 다시 인간의 자유와 주체성을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르네상스인데, 이 시기에 단번에 유럽이 바뀔 수 있었던 것은 고대 그리스 로마라는 근사한 원형 및 본보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그때로 돌아가자" 하는 명확한 모델이 있었기 때문에 그 위대한 도전이 실현 가능했던 것입니다.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뭔가를 이루고자 할 때 그 명확한 모델이 없으면 그런 기분이 들어도 꾸준히 밀고 나가 마침내 확실하고도 극적인 변화를 이루어내기는 어렵습니다.

<p.88>

 

 현대사회에서는 '우선 냉장고, 다음은 텔레비전, 그 다음은 자동차...' 하는 식으로 무엇이 갖고 싶다 하는 욕구가 과거에 비해 현저히 적어졌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소비는 실제적인 소비보다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기호를 소비하는 형태로 발전하게 됩니다. 기본적인 욕망이 이미 채워졌으니 새로운 욕망을 만들 필요가 생긴 것이죠.

 그렇다면 이러한 '브랜드에 대한 욕망'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그것은 개인이 자신의 존재와 위치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감을 갖지 못하는 불안감에서 비롯됩니다. 자신감이 사라진 데서 오는 불안감이 존재하는 한 브랜드 물건은, 그러한 마음의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사람들에게 일종의 보강제로서 기능할 것입니다. 또한 현대 사회에서의 광고와 선전은 비록 겉모습은 다양한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불안감을 부추기는 것으로 구매에 대한 욕망을 만들어냅니다.

<p.186> 

 

 마르크스보다 조금 늦게 등장한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마음의 하부구조로서 인간의 무의식에 주목했습니다. 그에 반해 마르크스는 사회의 하부구조로서의 경제에 주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확실히 "사람은 경제적인 위치와 수입에 의해 사고방식이 달라진다. 따라서 문화 또한 경제적인 기반에 의해 달라진다"라는 명제는 탁월한 통찰력을 담고 있습니다. 마르크스가 <자본> 등의 책을 통해 그런 견해를 피력하기 전까지는, 사람은 누구나 자유롭게 사고하는 존재다, 무엇이든 자신이 선택하고 결정한다, 사회나 사물에 대한 견해 등은 모든 것을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다, 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아니 그의 이론이 등장한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그에 동의하기 시작했습니다.

<p.200>

 

 선전은 모두 대중적이어야 하며, 그 지적 수준은 선전이 목표로 하는 대상 중 최하 부류까지도 알 수 있을 만큼 조정되어야 한다. 그 지적 수준은 선전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인 사람도 이해할 수 있는 정도로 조정해야 한다. 따라서 획득해야 할 대중이 많으면 많을수록 순수한 지적 수준은 그만큼 낮게 해야만 한다.
 민중의 압도적 다수는 진지하고 냉철한 사고나 이성보다 감정적, 혹은 감상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여성적 기질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감정은 복잡하지 않고 매우 단순하며 폐쇄적이다. (...) 긍정 아니면 부정이며, 사랑 아니면 미움이고, 정의 아니면 불의이며, 참 아니면 거짓이다. 반은 그렇고 반은 그렇지 않다든가, 혹은 일부분이 그렇다는 일은 없다.
- <나의 투쟁> 아돌프 히틀러

<p.226>

 

 인간은 누구나 타인에 대해 자신이 우위에 서기를 원합니다. 따라서 자신보다 좀 못한 존재가 있으면 안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 사람은 불안해지면 자신과 다른 것을 찾아내 배제하는 것으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하나가 됨으로써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p.230>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제국의 야망과 하나가 되었고, 이슬람교는 한편으로 관용적인 측면을 갖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전 세계적인 분쟁의 불씨가 되고 있습니다.
 
 원래 기독교와 이슬람교 모두 유대교라는 일신교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유대교가 말하는 메시아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는 것이 기독교, 아직 메시아는 왕림하지 않았다고 믿는 것이 유대교, 예수도 모세처럼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예언자의 하나로, 무함마드가 최후의 예언자라고 주장하는 것이 이슬람교입니다. 따라서 이 세 종교가 말하는 '신'은 사실 같은 신입니다.
 
 당연하게도 세 종교의 경전을 보면 공통적인 내용이 많습니다. 유대교의 경전인 토라는 기독교의 구약성서에 해당합니다. 기독교에는 여기에 신약성서가 더해지죠. 이슬람교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경전은 무함마드가 받은 신의 말씀을 기록한 꾸란인데, 구약, 신약 성서도 성경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단, 성서에는 잘못된 것도 쓰여 있다, 진짜 정확한 신의 말씀은 꾸란뿐이다, 라는 것이 이슬람교의 입장입니다.

<p.240>

 

 '자신을 위대한 무언가에 바침으로써 안정을 얻는다'는 역설적인 회로가 바로 종교와 신앙의 근본입니다. 그것도 단순히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버리고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의 생활이 인간의 지혜가 미치지 않는 자연이라는 위대한 힘에 농락당한 것이 바로 이러한 신앙이 생겨난 배경입니다. 따라서 당시 사람들에게 신앙은, 자신을 그런 위대한 힘의 일방적인 피해자 입장에서 그 힘의 은혜에 관여하는 적극적인 존재로 바꾼다는 데 의미가 있었습니다.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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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세계사의 흐름과 그 속에서 일어난 굵직한 사건들을 욕망, 모더니즘, 제국주의, 몬스터(사회주의, 자본주의, 파시즘), 종교 이렇게 다섯 가지 원인으로 나누어 이야기하는 책이다. 나처럼 세계사를 잘 모르는 사람도 읽기에 부담이 없었다. 만약 이 책이 단순히 시간 흐름에 따라 역사를 설명하는 일반적인 책이었다면 과거와 현재의 맥락을 파악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텐데 이 책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다른 시대에 일어났지만 같은 원인으로 발생한 일들을 모아 설명하기에 개별 사건에 대한 역사적 배경 지식이 부족해도 그 사건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18세기에는 이런 일이 발생했고, 19세기에는 저런 일이 일어났다.' 라는 식으로 사건의 나열만 있었다면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사건의 본질을 이해하기가 더 어려웠을 것이다. 마치 우리가 학창 시절 세계사 혹은 국사를 배웠을 때처럼 말이다. 그때 국사 공부의 시작은 늘 '구석기 - 신석기 - 청동기 - 철기'부터였다. 여기를 먼저 이해하고 외워야 다음 시대로 넘어갈 수 있었다. '고조선 - 삼국 - 고려 - 조선' 시대로 이어지는 다음 역사에서도 조선 시대의 정치가 현실과 비슷한 것 같아 흥미롭게 느껴져도 고려 시대보다 먼저(혹은 더 많이) 공부할 수는 없었다. 아마 내가 학창 시절 국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도 바로 이런 점 때문이었던 것 같다. 시간 순서대로 공부했기 때문에 사건의 본질에 대한 이해보다 '뭐 다음에 뭐, 이거 다음에 이거'라는 점에 더 의미를 둔 공부였던 것 같아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기 때문이다. (시험 단골 문제 중에서는 '다음 중 사건이 일어난 순서로 맞는 것을 고르시오'라는 문제에 ㄱ-ㄷ-ㄹ-ㄴ 인지, ㄷ-ㄹ-ㄱ-ㄴ 인지 고르는 문제가 있었다.)

 

 물론 역사라는 것이 E.H.카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 이기에 과거를 아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는 사실에는 동의한다. 이 책도 특정 사건에 대한 과거의 배경을 아예 설명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과거의 배경을 설명하지 않고서는 사건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현재는 과거의 여러 가지 요인들이 한데 뒤섞이고 엉켜 만들어진 것일 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런 완벽한 이해는, 즉 지난 과거의 사건들을 줄줄이 나열하면서 세계사가 어떻게 오늘날까지 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해는 역사학자들에게 맡길 일이 아닐까? 우리는 '그게 그래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아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이런 점에서 봤을 때 이 책이 세계사를 서술한 방식이 참 마음에 들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종교는 지금 현재에도 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과거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었는지 역사적 사건들을 되짚어보며 세계사의 한 귀퉁이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런 해석에는 어쩔 수 없이 작가의 해석이나 통찰이 들어갈 수 밖에 없어 간혹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작가의 시선도 있긴 했지만 대체적으로 흥미롭고 쉽게 읽을 수 있었던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