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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행운 > 김애란, 2012

by Ditmars 2022. 8. 16.

<비행운> 김애란, 2012

 

 나는 스무 살을 새로운 도시에서 맞는 게 좋았다. 철학과 사람들의 눈빛과 말투, 안색에도 호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나이엔 의당 그래야 하는 듯 알 수 없는 우울에 싸여 있었고, 내 우울이 마음에 들었으며, 심지어는 누군가 그걸 알아차려주길 바랐다. 환영식 날, 잔디밭에 모인 무리에서 슬쩍 빠져나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내가 거기 없다는 걸 통해, 내가 거기 있단 사실을 알리고 싶은 마음. 나는 모임에서 이탈한 주제에 집에도 기어들어 가지 않고 인문대 주위를 서성이고 있었다. 스스로 응성을 부리며 뭔가 흉내 내는 기분이 못마땅했지만. 숨은 그림 찾아내듯 누군가 나를 발견하고, 내 이마에 크고 시원한 동그라미를 그려주길 바랐다. 

<p.13, 너의 여름은 어떠니>

 

 광합성을 하는 사람에게는 광합성의 빛이, 전자파를 먹고 사는 사람에게는 전자파의 빛이 얼굴에 드러나기 마련이니까.

<p.16, 너의 여름은 어떠니>

 

 "신기해요. 어떤 음악을 들으면, 그 곡을 제게 처음 알려준 사람이 생각나요. 그것도 번번이요. 처음 가본 길, 처음 읽은 책도 마찬가지고요. 세상에 그런 게 있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 떠올라요. '이름을 알려준 사람의 이름'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건 사물에 영원히 달라붙어버리는 것 같아요."

<p.22, 너의 여름은 어떠니>

 

 "이 사진 좋다."
 선배가 '일시 정지' 단추를 눌러 슬라이드 쇼 상태에서 자동으로 넘어가는 사진을 멈추게 했다.
 "난 싫은데."
 "왜?"
 "이 가방 때문에요. 옷이랑 너무 안 어울리잖아요. 다리도 굵게 나오고."
 나는 황토색 인조가죽 가방을 가리키며 투덜댔다. 당시 내게 하나밖에 없던 가방이라 아무 옷에나 줄기차게 들고 다닌 거였다.
 "난 저 가방 때문에 이 사진이 좋은데."
 선배가 모니터를 응시하며 말했다.
 "에? 왜요?"
 선배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이 여자의 '생활'이 보여서."

<p.24, 너의 여름은 어떠니>

 

 "아저씨, 제가 저번에 택시에서 굉장히 좋은 노래를 들었거든요. 완전 감동적인. 근데 노래가 끝나기 전에 집에 다 와서 내려야 되는 거예요. 무슨 클래식인가? 처음 듣는 연주곡이었는데, 나 그런 거 하나도 모르는데, 그래도 좋은 거예요."
 "인간들은 참 신기해요. 그런 걸 다 만들어내고." (...)

 "그러니까 제 말은요. 그렇게 우연히 노래랑 나랑 만났는데, 또 너무 좋은데, 나는 내려야 하고, 그렇게 집에 가면서 나는 그 노래 제목을 영영 알지 못하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때가 있다는 거예요."
 용대가 물었다.
 "그럼 다 듣고 내리지 그랬어요."
 그녀는 나이답지 않게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런데 감동적인 음악을 들으면요, 참 좋다, 좋은데, 나는 영영 그게 무슨 노래인지 알 수 없을 거라는, 바로 그 사실이 좋을 때가 있어요."

<p.146,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

 

 "아 참 언니, 이번에 아기 엄마 되신 거 진심으로 축하해요. 언니를 못 본 새 언니가 그렇게 멋진 일을 해내리라곤 상상하지 못했어요. 만일 제가 언니의 아기라면 내 엄마가 언니란 사실이 무척 기뻤을 거예요."

<p.293, 서른>

 

 "저는 지난 10년간 여섯 번의 이사를 하고, 열 몇 개의 아르바이트를 하고, 두어 명의 남자를 만났어요. 다만 그랬을 뿐인데. 정말 그게 다인데. 이렇게 청춘이 가버린 것 같아 당황하고 있어요. 그동안 나는 뭐가 변했을까. 그저 좀 씀씀이가 커지고, 사람을 믿지 못하고, 물건 보는 눈만 높아진, 시시한 어른이 돼버린 건 아닌가 불안하기도 하고요. 이십대에는 내가 뭘 하든 그게 다 과정인 것 같았는데, 이제는 모든 게 결과일 따름인 듯해 초조하네요. 언니는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으니까 제가 겪은 모든 일을 거쳐갔겠죠? 어떤 건 극복도 했을까요? 때로는 추억이 되는 것도 있을까요? 세상에 아무것도 아닌 것은 없는데. 다른 친구들은 무언가 됐거나 되고 있는 중인 것 같은데. 저 혼자만 이도 저도 아닌 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불안해져요. 아니, 어쩌면 이미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더 나쁜 것이 되어 있는지도 모르고요. 소식을 전하면서도 한편으론 언니가 이런 얘기는 너무 많이 들어봤다고 할까 봐 겁이 나요. 언니는 이제 육아와 적금, 시가와의 관계나 건강 문제에 부딪힐 테고. 이전에 절박했던 문제는 그다음 과제들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는 걸 아는 나이일 테니까요. 그렇지만 지금은 이 얘길 언니에게밖에 할 수 없어 편지를 써요. 다 써놓고 끝끝내 부치지 못할지라도. 오늘 밤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요.

<p.294, 서른>

 

 앞에서 함께했던 것처럼 이 소설집에서 '비행운'은 셋이다. 그 하나는 비행운을 보며 새로운 삶을 꿈꾸는 동경의 형식이요, 둘째는 잠시의 형상일 뿐 이내 무화되는 비행운의 모습처럼 그 어떤 동경을 향한 실천적 움직임도 의미 있는 궤적을 산출하지 못한다는 비루한 존재론적 전락 혹은 비존재감의 형식이요, 그 셋째는 행복을 동경하는 주체들에게 끊임없이 가해지는 비행운의 연쇄가 암시하는 불우한 상처와 그 아픔을 함께 아파하기의 형식이다.

<p.346, 해설, 우찬제(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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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8편의 단편소설을 모은 소설집이다.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던 중 책의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처음에는 항공과 관련된 소설인가 싶었는데 뒤표지를 보니 다른 의미의 비행운을 뜻하고 있었다. 비행운(飛行雲)이 비행운(非幸運)이라는 동음이의어로 쓰인 것에 처음에는 조금 뜨악했다. 대개 행운의 반대말을 쓸 때는 불행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나. 그러나 8편의 단편소설을 전부 읽고 난 뒤에는 불행이라는 단어보다 비행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게 더 적합할 때가 있겠다 싶었다. 

 

 8편의 단편소설은 첫 편부터 우리에게 최악의 상황을 경험하게 한다. 그리고 그건 다른 편을 읽을수록 더 심해진다. '설마 그렇진 않겠지? 설마 더 그러진 않겠지?' 하며 마음 졸이며 페이지를 넘기면 어김없이 주인공에게 비행운(非幸運)이 일어난다. 읽고 있는 나도 같이 비참해지거나 절망에 빠진다. 아니면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워진다. 등장인물과 배경, 대화가 현실과 거의 흡사하여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갈수록 마음이 무거워지고 우울해진다. 장마철 거실 장판에 맨살이 닿는 것처럼 눅눅하기도 하고, 덥고 습한 바람을 불어내는 선풍기 바람처럼 축축하기도 하다. 최근에 음습하다는 단어를 알게 되었는데 이 책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음습한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분명한 건 이 책을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중간에 놓기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이다. 결말이 너무나도 궁금해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다. 그만큼 이야기들이 다양하고 매혹적이다. 해피엔딩으로 끝나기를 바라는 착한 마음 한 편에는 소설 속 주인공이 어디까지 불행해질 수 있는지 뒤에서 킬킬거리며 음흉한 미소를 짓는 마음도 동시에 존재하는, 그런 마음으로 읽게 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