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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 박혜란, 2013

by Ditmars 2022. 9. 2.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박혜란, 2013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아이를 어떻게 키우느냐도 결국 부모의 선택이다. 세상에는 아이 키우기에 대한 가이드가 차고 넘친다. 듣고 읽으면 다 그럴듯하다. 그렇다고 다 따라 할 수는 없다. 남들 하는 대로 한다고들 하는데 그 남들이 대체 누구인가. 내가 따라 하기로 선택한 남들일 뿐이다. (...)

 모든 것은 다 지나가듯이, 육아 또한 잠깐이면 지나간다. 그 잠깐을 걱정으로 채우지 말고 즐거움으로 채워 가면 나머지 인생도 그렇게 채워질 거라고 믿는다.

<p.11>

 

 내 생각으로는 어렸을 때 키워 주어야 할 것은 인지능력이 아니라 공부건 놀이건 즐기는 법을 가르치는 일이 아닌가 싶다. 그것도 엄마가 앞장서서 주입식으로 가르치려 들지 말고 아이가 스스로 즐기는 법을 터득하도록 충분한 시간을 주는 것이 좋다. 놀이터에 친구가 없다고 서둘어 학원 순례에 내보내는 대신 혼자 있을 때 어떻게 노는지 아무 간섭 없이 내버려 둬 보자.

 처음엔 어쩔 줄 모르다가도 이내 노는 방법을 잘도 찾아내는 능력이 모든 아이들에겐 있다. 아이들은 할머니 집에 장난감이 없어도 벽장이나 책상 밑에 들어가 재미있게 논다. 이불과 베개만 갖고도 잘 논다. 마냥 내버려 두면 때로는 심심해하기도 하지만 결국 놀이를 만들어 낸다.

<p.38>

 

 아이가 내 뜻대로 된다고 자랑 말고, 아이가 내 뜻대로 안된다고 걱정 말라. 반대로 아이가 내 뜻대로 된다면 걱정하고, 아이가 내 뜻대로 안 되면 안심하라. 가장 걱정해야 할 문제는 아이에게 뜻이 없다는 거다.

 모든 부모는 장차 내 아이가 이 거친 세상을 자기 힘으로 헤쳐나가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스럽다. 그래서 부모는 자신의 모든 힘을 바쳐 아이를 도와주려 애쓴다. 하지만 모든 도움은 지나치지 않아야 한다. 도움이 지나치면 아이는 아예 혼자 설 생각조차 못하도록 길들여진다. 아이는 부모의 뜻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되고 만다.

 아이가 엄마 뜻대로 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대신 아이의 뜻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들어 보라. 네가 뭘 안다고 까부냐고 핀잔하지 말고 네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하냐고 칭찬해 주어라. 아이가 자신의 뜻을 내비치는 것 자체를 반겨라.

 걷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던 조그만 아이, 그저 '엄마~'만 찾던 아이가 어느새 이렇게 훌쩍 커서 나에게 '싫어!'라고 말하다니 얼마나 경이로운가. 저 주먹만 한 머리통 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 있어서 엉뚱한 말들을 쏟아 내는지 신통방통하지 않은가. 

 나 없으면 꼼짝도 못할 것 같던 아이가 '엄마는 아무것도 몰라'라며 있는 대로 잘난 척을 해 대다니 이처럼 신기한 일이 또 있으랴. 이게 바로 아이 키우는 재미 아닌가.

<p.49>

 

 어떻게 아이를 키울 것인가는 결국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와 동떨어진 문제가 아니다. 내 인생관이 곧 내 자녀관이요, 내 교육관일 수밖에 없다. 남들이 어떻게 아이를 키우고 있는가는 참고사항일 뿐 그것에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엄마는 이런 엄마다.

 첫째, 아이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고 고맙게 생각한다.
 둘째, 아이를 끝까지 믿어 준다.
 셋째,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넷째, 아이의 생각을 존중한다.
 다섯째, 아이를 자주 껴안아 준다.
 여섯째, 아이와 노는 것을 즐긴다.
 일곱째, 아이에게 공동체의 룰을 가르친다.
 여덟째, 아이에게 짜증을 내지 않는다.
 아홉째, 아이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특히 공부하라는.

<p.55>

 

 나는 일사천리로 대답해 준다. 아들과 며느리는 '그 밥에 그 나물'이다. 어쩌면 하나같이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저에게 딱 맞는 배우자를 골랐는지 경탄스러울 지경이다. 그러니 아들이 마음에 드는 꼭 그만큼 며느리도 마음에 든다. 설사 내 마음에 안 든다 해도 그게 무슨 상관이냐. 저희들끼리 사는 거지, 나하고 사는 거냐. 게다가 아들이라고 늘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잖냐. 아니, 나 자신은 내 마음에 드냐.

<p.67>

 

 결혼 후에도 아들이 엄마를 완전히 몰라라 하지 않기를 바란다면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밀어내는 연습을 하면 된다. 사람이란 원래 떠나보내려고 하면 다가오고 싶어 하고 다가가면 떠나가고 싶어 하는 존재니까.

<p.69>

 

 엄마의 진정을 몰라주고 제멋대로 하려는 아이 때문에 세상이 무너진 듯 한숨을 쉬는 부모들에게 내가 하는 첫마디는 '아이가 내게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라는 상당히 현학적인 냄새를 풍기는 주문이다. 도대체 아이가 내게 무엇이기에 내가 이토록 걱정스럽고 불안한 것일까. 살다 보면 너무 당연해서 오히려 깊이 생각해 보지 않는 질문을 진지하게 파 들어가는 게 도움 될 때가 많다.

 아이는 예전처럼 한 집안의 대를 이어 주는 후계자라는 생각은 소위 뼈대 있는 몇몇 집안을 제외하면 단기간에 사라진 듯 보인다. 지난 몇십 년 사이에 꼭 아들을 낳아야겠다는 사람들이 갑자기 드물어진 걸 보면, 또 들을 때마다 손발을 오글거리게 만드는 '사랑의 열매'라는 낭만적인 말도 한때 연애소설이나 수기에서 자주 보였는데 어느새 슬그머니 사어가 되어 버렸다.

 대신 요즘은 엄마나 아빠나 다들 아이를 자신의 분신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분신이기에 자신의 뜻대로 자라 주어야 하고 크게 성공하진 못해도 적어도 자신보다는 성공한 삶을 살아 주기 바란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뒷바라지할 각오가 되어 있는데 아이가 그 뜻을 몰라 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는 게 부모들의 고민이다.

 그게 문제다. 아이를 자신의 분신으로 생각하는 부모는 아이가 독립적인 인격체라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아이의 의지와 욕구가 따로 있다고 믿지 않기에 자신의 의지와 욕구를 강요한다. 나의 배경이 나빴기 때문에, 능력이 모자랐기 때문에 하고 싶었는데 못 했던 것, 이루고 싶었는데 못 이룬 것들을 나의 분신이 대신 이뤄 주기를 간절히 원한다. 현재의 내가 불만족스러울수록 아이에 대한 기대는 커져 간다. 기대가 무너지면 원망도 커진다.

<p.71>

 

 이것도 양극화 현상일까. 우리 사회는 어느 땐가부터 낙오한 사람들은 물론 평범한 사람들까지 싸잡아 찌질이로 부르는 것 같다. 선거 때마다 국민의 99퍼센트가 상위 1퍼센트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도록 부추긴다.

 분위기가 이렇게 가니 훌륭한 사람이 되기도 점점 어렵게 된다. 큰 돈을 벌지 않아도 크게 성공하지 않아도 크게 유명해지지 않아도 얼마든지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은 그저 얍삽한 위로 말씀으로 들린다.

 그래서 엄마들은 내 아이가 진짜 훌륭한 사람이 될 확률은 1퍼센트도 안 되리라는 체념을 이미 가슴 밑바닥에 깐 채 입으로는 끊임없이 아이에게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닦달한다. 아이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보니 자연히 아이의 현재가 낙관적으로 보일 리 없다. 훌륭한 사람의 범위가 너무 좁기 때문에 아이가 웬만큼 훌륭하게 자라도 후한 점수를 주는 데 인색하다.

 아이가 아무리 상냥하고 인사성 바르고 성실하고 정직해도 뛰어난 성적이나 뛰어난 재능을 보이지 않으면 엄마는 못마땅하기만 하다. 오히려 속으로 성격은 조금 못돼도 좋으니 더 똑똑해지기나 했으면 좋겠다고 바란다. 이미 훌륭한 인품을 가진 아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에 눈이 멀어 내 아이의 단점을 못 보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 반대로 객관적 평가라는 이름 아래 내 아이의 장점에 인색한 것은 더 큰 문제이다. 엄마가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 기준들이 실은 지나치게 세속적인 것, 통념적인 것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p.85>

 

 엄마가 아이보다 더 오래 살았으니 아이보다 더 잘 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나이가 반드시 혜안을 만들어 주진 않는다. 아이를 훌륭하게 키우고 싶다면 내 생각은 과연 얼마나 훌륭한지 성찰하고 또 성창해야 한다.

 아이 키우는 가장 큰 소득은 이렇게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나도 덩달아 커 가는 게 아닐까.

<p.88>

 

 아이를 언젠가는 떠날 손님이라고 생각하면 아이에 대한 생각이 확 달라진다. 내 맘보다 아이의 맘을 살피게 되고, 어떻게든 늘 잘해주고 싶고, 단점보다는 장점에 더 눈이 가며, 조그만 호의에도 고마워하게 된다.

 그리고, 먼 훗날의 이별이 문득문득 떠올라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애잔해진다. 어느 날 갑자기 닥칠 이별의 순간을 떠올리니 평범하기만 했던 지금 이 순간이 갑자기 소중하게 다가온다. 지금 이 순간 사랑하는 아이가 내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새삼 모든 것이 고맙게 느껴진다. 똘망똘망한 눈망울의 아이가 한없이 모자라기만 한 나 같은 사람을 엄마라고 부르면서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모습도 새삼스런 감동이다. 혹시라도 아이를 잘못 키우면 어떻게 하나라는 막연한 불안감 때문에 그간 아이 키우기의 기쁨과 보람을 잊고 살았음을 불현듯 깨닫게 된다.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아이를 바라보고 있자니 내가 억지로 키우려 애쓰지 않아도 아이는 잘 자라리라는 믿음이 점점 확고해진다. 이렇게 믿음직한 아이를 그동안 몰라보다니 왜 그랬을까.  아이를 키운다는 게 이렇게 고마운 일인 걸, 이렇게 쉬운 일인 걸 왜 그렇게 어렵게만 생각했는지 정말 모를 일이다.

<p.94>

 

 그러니 아이를 키운다는 건 결국 아이가 혼자 클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것이고 그것은 곧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일이다. (...)

 어렸을 때부터 자기가 원하는 걸 분명하게 드러내는 아이를 둔 부모는 행운아들이다. 원하는 것이 부모의 기대에 들어맞지 않는다고 무조건 찍어 누르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도대체 나는 얼마나 잘 살아왔으며 또 얼마나 자신만만하기에 아이의 선택에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가. 부모는 그저 능력이 닿는 대로 성의껏 뒷바라지나 해 주면 족하다.

<p.114>

 

 내 아이의 창의성을 길러 주기 위해서 부모가 할 일은 아이의 호기심을 엉뚱한 생각 말라며 묵살하지 말고 아이에게 시간의 족쇄를 채우지 말며 될 수 있는 한 아무 과제도 없이 그저 자유롭게 놀 시간을 허하는 일뿐이다.

<p.129>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쭈그리고 앉아 퍼 주는 지식을 꾸역꾸역 받아먹다 보면 스트레스가 쌓이고 짜증이 나 때로는 폭발시키고 싶은 충동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걸 이해해 주고 그 충동을 다른 아이한테 푸는 대신 건강하게 발산하는 방법을 함께 찾아보는 노력을 해야 한다. 함께 공을 차거나 줄넘기를 하는 등의 운동도 좋고 연극이나 영화, 음악회에 다니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 시간에 영어단어 하나라도 더 외우고 수학 한 문제라도 더 풀어야 한다고? 인성교육은 대학에 들어가서 해도 늦지 않는다고? 부모가 바로 그렇게 생각해 왔기에 학교폭력이 이 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학교에서 체육시간을 늘렸더니 곧바로 항의 전화를 하는 부모들이 있다는 어느 교사의 말에 가슴이 답답해진다.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항상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표현하는 습관을 길러 주어야 한다. 사람의 심리는 묘해서 굴종하는 상대에 대해서는 점점 더 멸시하게 된다. 부당한 요구에 대해서 싫다고 딱 부러지게 말하면 당장은 더 화를 내고 폭력을 휘두르지만 속으로는 두려움이 일게 마련이다.

<p.136>

 

 문제는 어떻게 해야 아이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찾아낸다는 것이 부모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과제라는 것이다. 부모 자신부터 과거에도 현재에도 행복해 본 기억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어쩌다 가끔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입니까'라는 질문이라도 받을라치면 세 살 때부터의 기억을 짜고 또 짜내도 자신 있게 '아, 바로 그때요'라고 내놓을 순간이 별로 없다.

 지금 젊은 부모들은 배를 곯아 본 경험은 없지만 불행히도 철들기 전부터 공부에 쫓기고 취업에 쫓기고 생계에 쫓기느라 뭐가 행복인지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던 세대다. 그저 막연히 그때그때 닥치는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행복이 찾아오려니 기대하며 버텼지만 '고생 끝에 낙'은커녕 '고생 끝에 더 큰 고생'을 만나기 일쑤였다.

 이렇게 행복의 기억을 차곡차곡 쌓아 놓지 못한 부모가 어느새 아이를 행복하게 만들어 줘야 할 큰 과제를 떠맡고 말았다. 그 과제가 너무 버겁긴 하지만 부모는 이를 악물며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나는 어떻게 살든 내 아이만은 행복하게 살게 해야지." 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 가장 믿음직하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하지 않다면 아이는 과연 누구로부터 행복하게 사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p.148>

 

 행복한 아이가 성공한 아이다.

<p.151>

 

 아이를 억지로 키우려 하지 말자. 엄마가 크면 아이도 따라 큰다.

<p.161>

 

 살아가면서 새록새록 느끼는 것 중의 두 가지는 '이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그리고 '허투루 보낸 시간은 없다'는 사실이다. 나 역시 한창 살림과 육아에 매달려 있었을 때는 몰랐었지만.

 아이들만 무한한 잠재력을 갖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엄마들도 그렇게 태어난 존재다. 다만 오랫동안 잠재력을 펼칠 마당을 만나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니 아이들의 미래를 준비하면서 동시에 엄마들의 미래도 함께 준비해야 한다. '나는 끝까지 엄마로서 살고 싶다. 그게 내 꿈이다'라는 엄마가 있다면 그것도 좋다. 그의 적성은 엄마니까.

 고백하자면, 난 아이가 여섯 살 때까진 내가 엄마 적성인 줄 알았다. 아이들과 어울려 비벼 대고 칼싸움하는 걸 너무 좋아했으니까.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며너부터 내가 엄마 적성이 아니라는 걸 발견했다. 대한민국 학부모 노릇이 너무 싫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시작했다. 글쓰기와 말하기, 그게 나의 적성이었다.
 
 내가 태어나서 가장 잘한 게 있다면 아이들 셋을 낳은 것, 그리고 마흔 넘어 적성에 맞는 일을 찾은 것 그 두 가지다. 살다 보면 때론 자괴감에 빠져 허우적댈 때도 많지만 그때마다 난 스스로를 위로한다. 넌 그래도 두 가진 잘했잖아.

<p.173>

 

 고 박완서 선생님은 살아생전 늘 요즘 사람들이 자신이 누리는 풍요를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꾸만 더 많이 가지기만을 원한다고 지적했다. 금융위기 때도 너도나도 그저 못살겠다, 죽겠다 엄살 부리는데 따지고 보면 우린 역사 이래 이만큼 잘 산 적이 한 번도 없었노라고, 좀 초연하게 느긋하게 생각하면 좋겠다고 안타까워했다.

 나 역시 겉이 풍요로워질수록 속은 비어 가는 걸 느낀다. 많이 먹을수록 먹고 싶은 것들이 늘어난다. 온갖 성인병을 앓으면서도 식탐을 끊기가 너무 힘들다. 요즘 엄마들도 겉은 나날이 세련되어 가는데 속은 갈수록 강퍅해지는 것만 같다. 내 아이 챙기기에 급급해 다른 아이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p.178>

 

 누구나 잘하는 게 있고 잘 못하는 게 있다. 적성에 맞으면 별로 노력하지 않아도 더 잘할 수 있지만 안 맞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잘 안되기 십상이다. 애써도 잘 안되는 아이와 덜 애써도 잘 되는 아이를 단순 비교해서 '네가 노력을 덜 해서 그런 거야'라는 식으로 평가하고 닦달하는 건 어른들의 폭력이다. 아이인들 왜 잘하고 싶지 않겠는가. 아무리 노력해도 잘 안 돼서 이미 스스로 좌절하고 있는 아이를 격려는 못할망정 상처에 소금 뿌리는 짓들을 어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고 산다.

<p.202>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 모든 것들이 강조하는 최고의 처방은 '마음 비우기'가 아닌가 싶다. 당신은 이미 너무나 많은 것을 갖고 있는데도 더 갖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아프다. 외롭고 괴롭다. 행복은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라 바로 당신의 마음속에 있다. 그러니 진정으로 행복을 원한다면 당신 속의 욕망을 잠재우라는 주문이다. 마음 비운 곳에 행복이 채워지려니.

 그러나 마음을 비우겠다고 마음먹기야 어려울 것 없지만 욕망은 이미 마음을 넘어 몸으로 체질화되어 버렸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로서는 단숨에 비우기는커녕 아주 조금씩이라도 덜어 내기조차 지난한 작업이다. 그래서 우리는 진짜 종교인을 두고두고 존경하는 것이 아닐까. 한편으로는 욕망은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에 떨쳐 낼 수 없다, 또는 욕망이야말로 이 팍팍한 현실을 헤쳐 나가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생존기술이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우물우물 넘어가곤 한다.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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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나 아이를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읽기 좋은 책이다. 작가는 1996년에 쓴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에 이어 17년 뒤 이 책을 썼다. 두 책 다 읽어 본 입장에서 둘을 비교해보자면 전작은 자신도 같은 엄마의 입장에서 아이를 키웠던 당시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아마 아직 육아에 대한 기억이 더 생생하게 남아 있으셨을 때라 그런 것 같다. 세 아들은 이미 다 컸지만 본인은 아직도 그 바쁘고 정신없었던 육아의 현장에 있는 듯 그때의 여러 고민과 감정들을 솔직하게 얘기한다. 그에 비해 이번 책은 어느 정도 육아의 현장에서는 한 발 떨어져 이야기를 하는 듯하다. 예전에는 본인도 엄마들 중 한 사람이었다면 이제는 시간이 흘러 더 이상 본인도 그들 중 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게 된 것이다. 실제로도 손주를 둔 할머니가 된 작가는 제삼자의 입장에서 과거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현재의 육아에 대해 이야기한다. 과거에 비해 좋아진 육아 환경을 얘기하며 자신의 과거 모습에 대해 아쉬워하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나 현재나 동일하게 적용해야 하는 육아관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말 그대로 지금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다르게 하고 싶은 것,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 달라지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한 책이다.

 요즘 육아에 있어 조부모의 역할은 거의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결혼을 하고 집을 구할 때부터 처세권(역세권처럼 처갓집이 근처에 있는 지역을 뜻하는 말)을 고려하기도 하고, 아이를 낳으면 어느 쪽 조부모가 되었건 거의 같이 살다시피하며 도움을 받는 집이 많다. 맞벌이가 대부분인 우리나라 부부들의 입장에서는 육아휴직이 길어야 1년 정도인데 직장에 다시 복귀할 시점부터는 돌도 안 된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결국 조부모에게 손을 빌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과거 부모 세대의 육아관과 현재 우리 세대의 육아관이 충돌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조부모들은 '예전에 너희들 키울 땐 다 이렇게 키웠어'라는 경험을 토대로 아이를 키우고자 하고, 현재의 부모들은 '인터넷에는, 책에는 이렇게 하라고 되어 있어'라는 근거를 토대로 아이를 키우고자 하면서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나 역시 현재 육아의 현장에 있는 사람의 한 명으로서 그 차이가 발생할 때면 혼란스럽기도 하다. 정말 요즘 세대 부모들이 유난을 떠는 것인지 아니면 부모 세대들이 잘 모르고 키운 것인지 잘 모르겠다. 어찌 보면 육아에는 정답이 없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인지도 모른다.

 과거 부모 세대들이 육아를 하던 때와 현재 부모 세대가 육아를 하는 지금은 여러 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최근 몇 십 년간 급속도로 발달한 과학 기술과 경제 성장에 힘입어 그 차이는 거의 하늘과 땅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그 차이 속에서도 불변하는 육아관이란 게 존재할까?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면, 내 어린 시절과 그보다 더 과거를 떠올리면 우리나라에서 체벌은 크게 문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과거에는 체벌이 장려되는 세상이었다. 아이들 버릇을 고치기 위해서는 체벌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가정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도 공공연하게 체벌이 일어나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학교에서 체벌은 법적으로 금지되었고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아이들에게 체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이제는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나 역시 어렸을 때는 가정에서 그리고 커서는 학교에서 숱한 체벌을 경험했지만 내 아이에게는 체벌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서당에서부터 회초리를 맞아가며 예의범절을 배웠던 지난 몇 천년 동안의 우리 선조들의 육아는 잘못된 것이었을까? 체벌을 중단한 건 불과 몇 년 되지 않았는데, 그 짧은 기간 동안 여러 과학적 근거를 들어가며 내린 결론이 정말 옳은 결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러다 미래에 내가 할아버지가 되었을 때 '예전에 우리는 아이들한테 체벌은 상상도 못 했었는데... 요즘은 체벌을 하는구나' 같은 격세지감을 느끼게 되는 건 아닐까? 이와 비슷한 예는 꽤 많다. 우리 나라에서는 오다리를 만든다고 사라진 포대기도 최근 해외에서 많이 유행을 하고 있고, 보육시설(어린이집, 유치원)에 보내는 시기에 대해서도 '적절한 시기'라는 게 거의 매년 달라지고 있다. (애석하게도 점점 시기가 빨라지고 있다.) 육아에도 트렌드가 있다는 얘기는 들었었는데 혹시 지금 나도 어떤 트렌드에 휘둘리며 육아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정작 과거나 지금이나 변하지 말아야 할 육아관에 대해서는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해봤는지 고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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