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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한 계단 > 채사장, 2016

by Ditmars 2022. 9. 5.

<열한 계단> 채사장, 2018

 

 "출항과 동시에 사나운 폭풍에 밀려다니다가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같은 자리를 표류했다고 해서, 그 선원을 긴 항해를 마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긴 항해를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오랜 시간을 수면 위에 떠 있었을 뿐이다."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가 남긴 말이다. 그는 잔인하게 덧붙인다.

 "그렇기에 노년의 무성한 백발과 깊은 주름을 보고 그가 오랜 인생을 살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백발의 노인은 오랜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래 생존한 것일지 모른다."

<p.4>

 

 학생들이 공부를 하지 않은 이유는 반대로 그들이 너무나 성숙했기 때문이다. 성숙한 영혼이 받아들이기에 정규 교육의 단조로움은 너무나도 하찮다. 학생들은 똑똑하다. 그들이 정말 알고 싶은 것은 진리의 문제, 사회 정의의 문제, 존재의 문제다. 나는 누구이고,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나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이 진정으로 알고 싶고 말하고 싶은 것은 놀랍도록 심오하다. 반면에 현행 교과는 그들이 바보가 되기를 원한다. 단순 암기와 기계적인 문제 해결 능력만을 강조한다. 고등학교 2학년이 넘어가면 학생들은 질문을 멈춘다. 그들은 실제 교과의 내용보다는 질문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어른들에게서 더 많이 배운다.

 성숙하고 똑똑한 학생일수록, 주체적이고 심오한 학생일수록 현행 교육 시스템에 적응할 수가 없다. 반면 지금의 교육 시스템은 변태를 길러내기에 적합한 구조를 갖고 있다. 건강하고 생명력 넘치는 나이에 자신의 욕구를 억제할 줄 알고, 친구나 가족의 안타까운 삶에 무관심할 정도로 자신의 좋은 성적을 위해 반복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기형적인 학생만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구조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이 더 건강하고 정상적인 학생일지도 모른다. 건강한 보통의 학생들이 정규 교육 시스템에 적응해 공부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영혼에 어울리는 가치가 부여되어야 한다. 좋은 성적을 얻거나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혹은 좋은 직장을 얻고 먼 미래에 풍요롭게 살기 위해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해준다면, 이 성숙한 영혼들은 흉내만 낼뿐 진심으로 공부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의 삶에 대한 존재론적 가치가 부여되어야 이들은 비로소 움직인다. 자신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해내기 위해 공부하고 있음을 학생 스스로가 이해해야 한다.

<p.41>

 

 중요한 것은 어른이 된 내가 열아홉의 나를 만난다 하더라도 소냐의 삶에 더 귀 기울여야 한다고 말해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자신만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행을 마친 사람이 여행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아무리 여행의 장단점과 주의사항을 말해줘봤자 소용없다. 스스로 밟아가야 한다. 직접 경험하고 실패하고 배우는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그래야만 여행을 시작한 사람은 여행이 끝날 무렵에 자신이 처음 들었던 이야기들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이해하게 된다.

<p.52>

 

 다만 확실한 출처를 찾을 수 없다고 하여, 그것의 진리성이 단번에 부정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가끔 성서의 출처가 불분명하고 내용의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이유로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성서를 믿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객관성과 합리성이 개인의 덕목이 된 근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주장은 타당하다. 실제로 맹목적인 신앙이 자신의 전부인 사람은 그다지 신실해 보이지도 않고, 타인에게 귀감이 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반대로 모든 판단의 기준을 근거와 출처에 두는 사람의 태도 역시 그다지 지혜로워 보이지 않는다. 생각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고 세계의 복잡성을 받아들일 만큼 유연하지 않은 사람일수록 확실한 근거에 집착하는 특성을 보인다. 그들은 특정 주장이 오랜 시간 판단 보류되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우선은 근거가 있느냐, 없느냐로 주장의 참과 거짓이 빠르게 판단되길 기대한다. 그러한 태도는 학문 안에서 이론을 정립하는 데 매우 효율적일 수 있다. 하지만 학문의 한계를 넘어 진리를 탐구하고자 하는 개인에게는 충분한 태도가 아니다.

<p.66>

 

 이러한 우월감과 선민의식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들이 사실은 나약하기 때문이다. 배움의 부족으로 세상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거나, 경제적인 자립을 하지 못하고 그 방법에서 두려움을 느끼거나, 현실에 대한 경험이 전무하여 타협과 조율에 익숙하지 않을수록 세상과 벽을 쌓고 작은 세계 안에서 완전함을 향유하려 한다.

 물론 그렇다고 이러한 이상주의자들이 문제적인 존재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시기를 거쳐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에 대한 우월감을 갖고 자신이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가져야 하는 시기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러한 경험은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며 세상과 대결해야 할 때 그 힘을 비축하게 하고, 세상에 무릎 꿇게 되었을 때에는 다시 일어서게 하는 자존감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p.96>

 

 니체는 근대 유럽사회를 진단한다. 그리스도교는 유럽을 병들게 했다. 노예의 도덕, 원한과 증오의 도덕이 유럽인들을 잠식하고 있다. 신에 대한 순종, 복종, 겸손, 절제라는 도덕 가치의 본질은 건강하지 않다. 이제 인간은 초라하고 수동적이며 부정적인 존재가 되었다. 

 니체의 진단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니체의 평가가 과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우리는 실제로 본다. 연단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순종과 복종을 말하고 겸손과 절제를 강조하는 사람들의 감춰지지 않는 분노를 말이다. 흥미롭게도 그들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무엇인가 거대한 것을 등에 업으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신을 말하고, 애국을 말하고, 도덕과 올바름을 말하는 사람들.

 우리는 의심해야 한다. 왜 그들이 지금 내 앞에서 신에 대한 순종을 말하는지, 왜 국가에 대한 복종을 말하는지, 왜 나에게 겸손하고 절제하는 도덕적인 삶을 살라고 강조하는지. 그러한 강요를 통해 도대체 자신은 무엇을 얻고 싶어 하는 것인지를 의심의 눈으로 직시해야 한다.

<p.107>

 

 붓다는 우리에게 말한다. 세상과 자아에 대한 인식을 바꾸라고 말이다. 우리는 보통 고정된 세계관과 고정된 자아관을 가지고 있다. 세상이 영원할 것이라 믿고, 나의 영혼도 불변할 것이라 믿는다. 그런 믿음은 나로 하여금 세상에서 영원한 부를 쌓게 만들고, 내 영혼의 영원한 안식을 찾아 종교에 매달리게 만든다.

 하지만 실제 세상과 자아는 그렇지 않다. 그것들은 끝없는 변화의 상태에 놓여 있다. 세상은 고정되지 않고 '무상'하다. 그리고 불변하는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다. 붓다는 '무아'를 말한다.

 무상과 무아는 세계의 엄밀한 진실이다.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우리는 세계와 자아에 집착하게 되고 여기서 고통이 생겨난다. 변화하는 세계에 집착하는 것은 흐르는 강물을 움켜쥐려는 것처럼 슬픔을 낳는다. 세계와 자아의 끝없는 변화를 받아들일 때, 집착과 욕망은 소멸하고 고통은 사라진다. 윤회의 고리는 끊어지고 우리는 깨달음에 이를 것이다. 붓다는 이를 위해 부지런히 정진할 것을 당부한다.

<p.120>

 

 기존에 우리가 가진 세계관은 다음의 세 가지 정도다. 첫째, 그리스도교의 세계관, 이 세계관은 영원히 지속하는 시간성을 기반으로 한다. 탄생과 성장 그리고 노화와 죽음 이후에도 우리의 영혼은 사후세계에서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둘째, 베다와 불교의 세계관, 이 세계관은 영원히 반복하는 시간성을 기반으로 한다. 우리는 탄생하고 성장하고 죽은 이후에 새로운 삶으로 다시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과학과 유물론의 세계관이다. 이 세계관은 단절된 시간성을 기반으로 한다. 우리는 죽음의 순간에 단절과 끝을 경험할 것이지만, 그 이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니체는 하나의 세계를 더 제시한다. 영원하고 조금도 변화하지 않는 반복의 세계. 예를 들어 1980년에 서울에서 태어난 당신은 대입시험을 치르고 회사에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갖고 늙어서 결국 죽게 될 것이다.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가? 영원회귀에 따르면 당신은 어떠한 변화도 없이 자신의 삶을 반복하게 된다. 다시 1980년에 서울에서 태어나 대입시험을 치르고 회사에 취직하고 결혼하고 늙고 죽게 되는 것이다.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다시 1980년에 서울에서 태어나 지금의 삶을 그대로 반복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이유나 목적도 없다. 성장도 없고, 휴식이나 끝도 없다. 다만 영원히 같은 삶을 반복할 뿐이다. 어떤가? 당신은 영원회귀의 진실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 끔찍한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당신의 삶을 긍정할 수 있는가?

 이런 영원회귀는 인가닝 상상할 수 있는 허무주의의 최고 형태다. 이러한 극단적인 허무를 인정하고 나의 삶을 끌어안을 수 있는 존재. "이것이 인생이라면 그래, 한 번 더!"라고 외치며 허무의 깊은 심연 속으로 뛰어들 수 있는 존재. 그가 바로 초인이다.

<p.155>

 

 하지만 어쩌겠는가. 전문성 획득은 현실적으로 필요하지 않은가. 나의 전문성은 나를 한 명의 어른으로 사회 안에서 자립하게 하고, 내 가족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한다. 먹고사는 문제만큼 중요한 게 또 어디에 있겠는가. 누구나 떠나고 싶다. 우물을 걷어차고 도망치고 싶다.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을 뿐이다. 사랑하는 배우자와 아이들을 위해서 우리는 얼굴에 미소를 띠고 지친 몸을 이끌고 우물가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래서 비극이 시작된다. 그 비극은 부모로부터 아이에게로 전달된다. 소중한 가정을 위해 스스로 하나의 노동자로, 하나의 전문가로 살아가기를 결심한 부모는 결국 자녀의 가슴에 슬픔을 남긴다. 자신의 날개와 다리를 자르고 우물을 파 내려가는 부모의 영혼은 거울 같은 자녀의 영혼에 깊은 잔상을 남긴다. 만약 인간에게 원죄라는 것이 있고, 그 원죄가 인간의 영혼을 갉아먹는 것이라면, 원죄의 본질은 자녀의 영혼에 깊이 새겨진 부모의 잔상이다. 날개와 다리를 스스로 꺾은 채 우물을 파내려 가는 부모의 뒷모습. 그 뒷모습은 자녀가 자신의 날개와 다리를 스스로 꺾어야 할 당위와 필연을 제공한다. 

 우리는 다시 여행자가 되어야 한다. 자녀도, 부모도, 모든 우물을 파는 영혼은 다시 여행길에 올라야 한다. 사회, 국가, 종교, 가정, 학교, 직장이 요구하는 의무와 평가에 저항해야 한다. 그들이 당신에게 전문성을 강요하고, 당신이 할 수 있는 일로만 당신을 평가하려 한다고 해서 그것을 삶의 목표로 삼고, 그것이 전부인양 맹목적으로 살아가서는 안 된다. 사회와 국가는 당신의 영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사회와 국가는 오직 당신의 노동력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당신은 노동자로 살기 위해 이곳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전문성의 요구에 저항해야 한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노동자가 아니라 나 자신으로, 국가와 사회가 규정해주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를 규정해나가는 주체적인 존재로 변모하게 될 것이다. 당신이 먼저 여행을 시작해야 한다. 당신이 주체적인 존재로 일어설 때, 당신의 자녀도, 가족과 친구도 부러뜨린 다리를 일으키고 꺾었던 날개를 힘차게 펼칠 것이다.

<p.168>

 

 귀납법의 오류는 영국 출신의 철학자인 데이비드 흄이 정확히 지적했다. 흄은 불쌍한 거위를 예로 든다. 어느 날 농부가 거위에게 모이를 준다. 신중한 거위는 바로 받아먹지 않고 주저하며 생각한다. '뭔가? 왜 이 거대한 동물은 나에게 먹을 것을 주는가?' 하루 이틀, 한 달 두달이 지나며 거위의 의심은 사라져 간다. 백 일째가 되던 날, 거위는 지금까지의 경험적 자료들을 정리해본다.

 첫 번째 날, 거대한 동물은 나에게 먹을 것을 주지만 공격하지 않음.
 두 번째 날, 거대한 동물은 나에게 먹을 것을 주지만 공격하지 않음.
 세 번째 날, 네 번째 날, 다섯 번째 날...

 백 번째 날, 거대한 동물은 나에게 먹을 것을 주지만 공격하지 않음.

 백 번의 관찰을 토대로 지혜로운 거위는 다음과 같은 하나의 일반적인 법칙을 정립하고 이것으로 학위를 받는다. "모든 날에 거대한 동물은 나에게 먹을 것을 주지만 나를 공격하지 않는다."
 학위 수여식이 예정되어 있던 부활절의 아침. 농부는 도끼를 들고 거위를 찾아온다.

<p.172>

 

 최근 물리학계에서도 인류원리를 통해 우주의 존재 방식을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어. 인류원리란 현재의 우주가 왜 이러한 모습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해명을 인간의 존재 가능성으로부터 찾으려는 시도야. 예를 들어, 우주에는 지금 현재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아주 정교하게 조정된 물리량들이 있어. 도대체 왜 이런 값을 가지고 있는지를 설명할 수 없는 미세 조정된 상수값들이지. 대표적으로 양자역학의 기본 상수 중 하나인 플랑크 상수나, 아인슈타인이 폐기했지만 우주 가속 팽창을 설명하기 위해 양자론에서 다시 도입한 우주상수 등이 있어. 우주에 왜 이러한 특정한 값들이 존재하는지를 설명하기는 어려워. 하지만 반대로 인간의 존재 가능성에서부터 출발하면 쉽게 답을 도출할 수도 있지.

 우선 무수히 많은 우주가 존재한다는 다중 우주의 개념을 전제해야 해. 이렇게 수많은 우주는 완벽히 독립되어 있고, 나름대로의 다양한 물리 상수들을 가져. 그 중에서 거의 대부분의 우주들은 적절하지 않은 물리 상수 값으로 너무나 급격히 수축하거나 팽창하여 파괴될 거야. 혹은 간신히 유지되더라도 지적인 생명체를 발생시키지 못할 수도 있어. 하지만 극소수의 우주는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결국 지적인 생명체를 발생시키겠지. 그리고 어느 날 그 지적인 생명체는 이렇게 생각할 거야. 우리 우주는 왜 특별한 상수값으로 미세 조정되어 있는 것일까? 하고 말이야.

 이러한 인류원리를 더 확장해보면 이런 생각으로 나아갈 수 있어. 20세기 미국의 물리학자 존 휠러는 우주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관찰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말에 대해서 고전 물리학자들은 격렬하게 반대할 거야 왜냐하면 고전 역학에서의 우주는 인간의 존재와 무관하게 이미 존재하는 실체니까. 하지만 생각해볼 만한 문제야. 지적인 존재들로부터 완벽하게 은폐된 동시에 자기 충족적이고, 그 안에 어떠한 지적인 생명체도 보유하지 않은 우주를 과연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도대체 그 대답을 할 수 있는 존재는 누구인가?

<p.198>

 

 "저도 예전에는 안 그랬지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군 생활이 너무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사람들도 힘들게 하고, 되는 일도 없고, 왜 힘든지 생각했더랬지 말입니다. 생각하다 보니까 보람도 성취도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생각했습니다. 그럼 왜 보람도 성취도 없나. 그랬더니 제가 모든 걸 대충하려고 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군대 일이란 게 그렇게 인생에서 중요한 것도 아니고. 그러니 구색만 맞추려고 한 거지 말입니다. 그렇게 저는 군 생활 전체를 중요하지도 않은 일로 채우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역해서 사회에 돌아가면 지난 2년은 버린 시간이 되겠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걱정이 됐습니다. 그러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20대의 가장 소중한 시간을 하찮은 시간으로 채울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짐했지 말입니다. 나한테 선물해야겠다, 군 생활의 2년을 의미 있는 시간으로 만들어서 스스로에게 선물해야겠다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뭐, 구두부터 닦기 시작했습니다."

<p.209>

 

 우리는 한 가지에만 집중한 사람들의 한계를 쉽게 본다. 책만 본 사람들과, 현실에 적응하기만 한 사람들의 한계. 우선 책만 본 사람들의 한계는 타인에게 엄격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세상이 쉽다. 왜냐하면 책의 울타리 속에서 안전하게 보호받으며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실제 세상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까닭에 현실의 폭력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다른 사람들이 나약할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리고 자신이 그들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막상 현실에 발을 디디면 이들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당황한다. 그리고 스스로의 나약함을 부정하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람이 된다. 모든 일에서 불평불만거리를 찾아내는 사람, 타인의 잘못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 선과 도덕과 정의를 습관적으로 강조하는 사람.

 다음으로 현실에 정응하기만 한 사람들의 한계는 자신에게 너무도 너그럽다는 것이다. 이들은 세상이 어렵다는 것을 잘 안다. 내 뜻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계획과 일정에 따라 정확하게 진행되는 일 따위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음을 정확히 알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문제에 봉착했을 때, 옳고 그름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타협과 조율을 통해서만 상황에 따라 문제를 봉합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사람이 된다. 선과 도덕에 대해 하찮게 여기는 사람, 모든 것을 손익으로 판단하는 사람, 심연의 깊은 대화가 불가능한 사람.

<p.250>

 

 "부르주아지는 자신이 지배하는 곳 어디서나 모든 봉건적, 가부장적, 전원적 관계를 종식시켰다. 부르주아지는 인간을 타고난 상하관계에 묶어 놓는 잡다한 봉건의 끈을 가차 없이 끊어버렸으며, 모든 인간관계를 적나라한 이기심과 냉혹한 현금지불관계로 바꾸어버렸다. 또한 가장 신성한 종교적 정열과 환희, 기사도적 열정, 세속적 감상주의를 자기중심적 이해타산이라는 얼음같이 차디찬 물속에 빠뜨려버렸다."
- 마르크스

<p.271>

 

 "네. 맞아요. 당신이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걸 잘 알아요. 사회 구조의 문제를 보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약한 자신이 미운 거죠. 그래서 더 세속적인 사람이 되려고 발버둥 치는 거고요. 하지만 당신은 잘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삶을 용기 있게 살아가고 있는 중이에요. 그렇지만 반쪽짜리 삶이었지요. 굳이 이상을 저 멀리 내팽개칠 필요는 없었어요. 지금처럼 현실을 묵묵히 걸어가세요. 동시에 언젠가 필요할 때 쉽게 꺼낼 수 있도록 이상도 함께 품고 가세요. 아무도 당신에게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하라고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p,315>

 

 "그렇다면, 삶이 다시 돌아오는 것이라면, 그때에는 허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환생과 윤회가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고, 실제로 너의 의식이 끝없이 다른 삶으로 옮겨가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래서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삶을 살아왔다면, 그때는 허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너는 핑계를 대고 있다. 삶이 허망하다고 느끼는 건, 사후 세계의 유무가 결정해준 것이 아니라 너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다. 만약 네가 영원한 존재라면, 죽지 않고 다치지 않고 그래서 수십억 년의 시간을 지속해온 존재라면 그때는 허망하지 않을 것 같으냐? 너는 그때도 허망하다고 말할 거다. 이 세상이 허망한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건 너의 마음이다."

<p.356>

 

 소중한 것일수록 곁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가족은 함께 살아야 하고, 부부는 서로 숨기는 게 없어야 하고, 자녀는 속마음을 부모에게 말해야 하고, 연인은 모든 추억을 함께해야 하고, 친구는 나와 가장 친해야 하고, 세상은 나를 받아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인간의 눈과 입은 원래가 모난 까닭에 가까운 대상일수록 쉽게 흠을 찾아내고, 쉽게 상처를 입힌다. 소중한 사람이라면,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들이 상처입지 않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그들을 당신으로부터 밀어내야 한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당신을 보호하는 방법은 그들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아니라, 그들을 그리워하는 시간이다. 기리워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외로운 시간이 필요하고, 아무 말도 없이 깊은 내면으로 고독해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p.364>

 

 저에게는 영화나 책이나 다른 여러 텍스트를 접하게 될 때마다 습관적으로 떠오르는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칼 융이 <티벳 사자의 서>를 해석하며 붙인 말입니다. 그는 <티벳 사자의 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이 책은 닫힌 책으로 시작해서 닫힌 책으로 남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만 영적인 이해력을 가진 사람에게만 열리는 책이기 때문이다.' 닫힌 책으로 시작해서 닫힌 책으로 남는다. 이 문장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아무리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꼼꼼하게 읽어간다고 해도 우리는 하나의 텍스트 안으로 마음대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숨겨진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유일한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텍스트에 대한 선이해입니다. 이것은 아이러니하고 또한 비극적입니다.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미 그 무엇인가를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죠. 우리가 책을 읽음으로써 A라는 지식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미 자신의 삶 속에서 A에 대해 체험했어야만 합니다.

 세상의 모든 텍스트는 우리에게 새로운 지식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텍스트에서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이미 우리가 그 지식에 대해 앞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책은 우리가 알고는 있지만 정리하지 못했던 것들을 언어화해줄 뿐입니다. 나의 체험을 벗어난 것들은 나에게 체험되지 않습니다.

<p.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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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번 읽은 책이다. 작가 채사장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과연 나는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고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아보고자 하는 책이다. 그간 작가의 책과 팟캐스트를 들으며 작가는 '후려치는데' 매우 탁월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말인즉슨 어떤 사안에 대해 구조화하고 단순화하는데 탁월하다는 의미이다. 후려치기 위해서는 복잡한 사안의 핵심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다. 복잡한 걸 복잡하게 설명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복잡한 걸 단순하게 설명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삶을 후려치고자 한다. 삶은 복잡하고 너무나도 많은 일이 일어나기에 삶 속에 놓여 있는 나라는 존재의 상황을 파악하기 무척 힘들다. 그러나 작가는 후려치기의 명수답게 본인의 삶을 논리적으로 구조화했다. 자신의 과거에 대한 많은 고민이 없었다면 이렇게 명료하게 책으로 쓰기 힘들었을 것이다.

 

 나에게는 몇 개의 계단이 있을까. 애초에 삶을 계단이라고 표현하는데 동의하는가. 꼭 삶이라는 것이 '성장'의 의미를 가질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지대넓얕> 팟캐스트의 <열한 계단> 북콘서트에서 이 주제에 대해 네 명의 패널들은 토론하였다. 누구는 삶은 계단이 아니라 빗면이라고 하였다. 삶이 깨달음으로 한 번에 하나씩 큰 계단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는 사이 점진적으로 성장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누구는 삶은 돌고 돌아 제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원이라고 하였다. 삶에는 늘 변화가 있지만 그것을 성장이라고 부르기는 어렵고 나라는 존재는 늘 그대로라는 뜻이다. 누구는 삶은 어둠으로 덮여 있는 지도와 같고 나는 그 어둠을 밝히며 가는 존재라고 하였다. 삶은 미지의 세계이며 성장도 변화도 아닌 우연과 발견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뜻이다. 삶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에 대해 들었을 때 오히려 나는 작가의 생각에 동의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도 삶은 어떤 계기가 주어지며 크게 성장해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도 나의 계단을 생각해보려 한다. 내가 어떤 큰 변화들을 겪으며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지금 막연하게 생각나는 계단 하나는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의 밤농구이다. 그때 나는 한창 농구에 빠져 있었다. 더운 여름에도 땡볕에 땀을 뻘뻘 흘려가며 농구를 했고 추운 겨울에도 손을 녹여 가며 농구를 했다. 동네에는 늘 농구를 같이 하던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S라는 친구와는 거의 매일 밤 같이 밤 농구를 했다. 휴대폰이 없었기 때문에 친구네 집으로 전화를 해서 약속을 했었던 시절이다. 대개 저녁을 먹고 밤 7~8시쯤 만나서 10시쯤 헤어졌다. S는 생각이 깊은 친구였다. 나는 S와 1대 1 농구를 하거나 아니면 각자 슛 연습을 하면서 대화를 나누곤 했다. 실없는 대화가 대부분이었지만 가끔은 서로 진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공부 얘기, 꿈과 목표에 대한 얘기, 당시 좋아하던 여자애에 대한 얘기, 삶에 대한 얘기, 허무맹랑한 얘기... 정확히 어떤 결론을 우리가 만들어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날의 밤공기, 농구공이 우레탄 코트에 튕기며 나는 소리, 적당히 빠르게 뛰는 심장박동 등이 기억난다. 그때 나는 S로부터 많은 위로와 격려를 받았다. 그건 마치 불안의 터널을 건너는 사춘기 소년이 그 곳을 헤쳐나갈 동료를 구한 것과 다름없었다. 그 친구와 그 시간을 통해 나는 어려운 시기를 잘 이겨낼 수 있었다. 아마 이것 말고도 여러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그간 나를 성장시킨 계단이라고 불릴만한 순간들이. 또 어떤 빛나는 순간들이, 또 어떤 빛나는 사람들이 내게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