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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 장하준, 2010

by Ditmars 2022. 10. 4.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장하준, 2010

 

 시장의 경계가 모호하며 객관적으로 결정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경제학이 물리학이나 화학 같은 과학이 아니라 정치적 행위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물론 자유 시장을 신봉하는 경제학자들은 우리가 시장의 올바른 경계를 과학적으로 확정할 수 있다고 믿기를 바라겠지만 그것은 틀린 말이다. 연구하는 대상의 경계를 과학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면 그것은 과학적 연구라고 할 수 없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새로운 규제에 대한 반대는 일부에서 아무리 현 상태가 부당하다고 지적해도 그대로 고수하자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또 기존의 규제를 철폐하자는 주장은 시장 영역을 확대하자는 말이나 다름없는데, 시장은 1달러당 1표 원칙에 따라 작동하는 만큼 돈 있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권력을 주자는 의미이다.

 따라서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이 시장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이유를 들어 특정 규제의 도입을 반대하는 것은, 그 규제를 통해 보호될 권리들을 부정한다는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 표명에 불과하다. 물론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논리는 순전히 정치적인 반면 자신들의 논리는 객관적인 경제학적 진실이라고 우기지만, 그들 역시 자신들이 반대하는 사람들만큼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다.

 시장은 객관적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이다.

<p.31, Thing 1 자유 시장이라는 것은 없다>

 

 문제는 주주들이 기업의 법적 소유주이기는 하지만, 불행하게도 여러 이해 당사자 중에서 기업의 장기적 생존에 제일 관심이 없는 집단이라는 사실이다. 주주들이야말로 기업에서 가장 쉽게 손을 뗄 수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가망 없는 회사의 주식을 무작정 붙잡고 있지 않을 정도로만 눈치 있는 주주라면, 필요할 때 약간의 손실을 감수하고 보유 주식을 내다 팔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반면 노동자나 납품 업체 같은 다른 이해 당사자들은 해당 기업의 요구에 특화된 기술을 축적했거나 설비 투자를 해 놓은 상태이기 때문에 해당 기업에서 벗어나 다른 대안을 찾기가 훨씬 더 어렵다. 따라서 주주들보다는 노동자나 납품 업체가 해당 기업의 장기적인 생존 여부에 더 민감할 수밖에 없다. 주주 가치 극대화가 경제 전체를 위해서는 물론이고, 해당 기업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p.44, Thing 2 기업은 소유주 이익을 위해 경영되면 안 된다>

 

 부자 나라의 어떤 개인이 비슷한 일을 하는 가난한 나라의 개인보다 실질적으로 생산성이 월등히 높은 분야에서조차, 그 격차는 개인의 능력 차라기보다는 시스템의 차이에서 생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부자 나라의 일부 개인이 가난한 나라의 동일 직종 종사자에 비해 생산성이 수백 배나 높을 수 있는 것은 단순히 그들의 머리가 더 좋다거나 교육을 더 잘 받았다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더 나은 기술, 더 나은 조직, 더 나은 제도와 물리적 인프라를 가진 경제 환경에서 살기에 그런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수세대에 축적된 집단적인 노력의 산물이다. 유명한 투자가 워런 버핏(Warren Buffett)은 1995년 한 TV 인터뷰에서 이 점을 훌륭하게 정리한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지금까지 벌어들인 돈의 많은 부분이 내가 몸담고 있는 사회가 벌어 준 것이라 생각합니다. 만일 나를 방글라데시나 페루 같은 곳에 갑자기 옮겨 놓는다면 맞지 않는 토양에서 내 재능이 얼마나 꽃 피울지 의문입니다. 30년 후까지도 고전을 면치 못할 거예요. 지금 활동하는 시장은 내가 하는 일에 아주 후한 보상을 내리는 환경입니다. 사실 불공평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큰 보상이지요."

<p.56, Thing 3 잘사는 나라에서는 하는 일에 비해 임금을 많이 받는다>

 

 도덕성은 착시 현상이 아니다. 고객을 속이지 않는 상인, 아무도 보지 않는데도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 쥐꼬리 월급에도 불구하고 뇌물을 받지 않는 공무원 등 사람들이 이기적이지 않은 행동을 하는 것은 대부분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보상과 제재 장치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우리가 하는 이기적이지 않은 행동의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가 없다. 그 장치의 존재 자체가 우리가 전적으로 이기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음에야 무슨 다른 설명이 필요하랴. "사회 공동체라는 것은 없다. 오직 남자, 여자라는 개인, 그리고 가족 단위만 존재할 뿐이다."라는 대처 여사의 주장과는 달리 인간은 사회라는 울타리 없이 고립된 이기적 존재로 살아온 적이 없다. 우리 모두는 도덕적 규범이 형성되어 있는 사회 안에서 태어나 그 규범들을 내 것으로 만드는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성장한다.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해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인간의 행동 동기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늘 자기 이익만을 쫓는다면 상거래에 속임수가 만연하고, 생산 라인이 너무 느려지는 등 세상은 제대로 돌아가지 못 했을 것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런 전제를 기반으로 경제 구조를 설계하면 효율성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 떨어진다는 점이다. 그런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도덕적 주체로 신뢰받지 못한다고 느끼게 되고, 결과적으로 도덕적 행동을 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감시, 판단, 제재하는 데 엄청난 자원을 들여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사람들이 최악의 행동을 할 것이라 예상하면 결국 최악의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p.80, Thing 5 최악을 예상하면 최악의 결과가 나온다>

 

 이런 인상을 받는 이유 중 하나는 미국이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더 불평등하다는 데에 있다. 어느 나라나 관광을 할 때에는 빈민가를 볼 기회가 별로 없기 때문에 우리는 유럽 여러 나라보다 미국에 빈민가가 훨씬 더 많은데도 그곳을 뺀 나머지 부분만 보고 미국이 더 잘산다는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이다.

<p.145, Thing 10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가 아니다>

 

 그러나 이미 높은 소득을 올리는 사람이 필요 이상으로 긴 시간을 일하는 것이 옳은지는 짚고 넘어갈 만하다. 소득 수준이 낮을 때에는 좀 더 깊게 일을 해서라도 돈을 더 벌면 삶의 질이 향상된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아주 가난할 때에는 공장에서 일을 더 오래 하더라도 돈을 좀 더 벌면 전반적인 삶의 질이 개선된다. 더 질 좋은 음식을 먹고, 난방이나 위생, 의료비 등에 돈을 더 쓸 수 있어서 건강 상태가 좋아지며, 가전제품들을 사고, 수도나 가스, 전기 시설 등을 이용할 수 있어서 가사 노동에 들어가는 수고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득 수준이 일정액을 넘어서고 나면 여가 시간에 대하 물질적 소비의 상대적 가치가 줄어들기 때문에 여가 시간을 줄여 가며 돈을 더 벌기 위해 긴 시간 일하는 것은 오히려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p.151, Thing 10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가 아니다>

 

 white elephant project. 불교에서 신성한 동물로 여기는 흰 코끼리는 동남아시아에서 왕권의 정당성과 위엄을 상징하기 때문에 일을 시킬 수 없는 짐승이다. 보기에는 번드레하지만 유지하는 데에는 엄청난 돈과 노력이 들어가는 데다 실질적인 이용 가치는 전혀 없는 물건을 가리킨다.

<p.171, Thing 11 정부도 유망주를 고를 수 있다>

 

 뉴욕의 브리티시 항공 광고판에서 본 콩코드 광고 문안은 아직까지도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을 만큼 인상적이었다. 광고는 사람들에게 콩코드를 타고 '떠나기 전에 도착하라'고 설득하고 있었다. (콩코드기로 대서양을 횡단하는 데에는 3시간이 걸리는데 뉴욕과 런던의 시차가 5시간이므로 런던에 도착하면 자기가 떠나기 전에 도착하는 셈이다.)

<p.177, Thing 11 정부도 유망주를 고를 수 있다>

 

 토마스 에디슨이나 빌 게이츠와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자본주의의 전설과 오스트리아 출신 하버드대 경제학 교수 조지프 슘페터의 선구적 연구 결과 등에 영향을 받은 우리는 기업가 정신을 너무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보려는 경향이 있다. 마치 기업가 정신이란 탁월한 비전과 굳은 결의를 지닌 영웅들에게만 있다고 착각을 하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누구나 열심히 노력만 하면 성공적인 사업가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여기서 나온 발상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기업가 정신을 개인적 차원에서 보는 견해는 옳고 그름을 떠나 점점 구식이 되어 가고 있다.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기업가 정신이라는 것은 점점 더 공동체적으로 함께 이루어 내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 되었다.

 다른 무엇보다 에디슨이나 빌 게이츠처럼 특별한 인물들도 수없이 많은 제도적, 조직적 지원을 받지 않았으면 오늘날과 같은 업적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이들이 지식을 습득하고, 또 자신이 생각한 것을 실험해 볼 수 있도록 해 준 과학 인프라, 크고 복잡한 조직을 갖춘 기업을 설립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한 회사법 및 기타 상거래 관련 법률, 이들이 설립한 회사에서 고용한 엔지니어, 경영진, 노동자 등을 양산한 교육 시스템, 회사를 확장하는 데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도록 했던 금융 시스템, 새로 개발한 기술을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해주는 특허법과 저작권법 등이 모두 그 예이다.

<p.220, Thing 15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부자 나라 사람들보다 기업가 정신이 더 투철하다>

 

 허버트 사이먼(Herbert Simon)은 우리의 합리성이 제한적이라고 주장했다. 인지심리학자들 그리고 자신을 포함한 많은 행태주의 경제학자들이 인간 행동의 많은 부분이 얼마나 비이성적인가를 잘 보여 주었음에도 사이먼은 사람들이 전적으로 불합리하다고는 믿지 않았다. 사이먼에 따르면 우리는 합리적이 되고자 노력하지만 합리적으로 되기 위한 우리의 능력에는 심각한 제약이 있다. 이 세상은 너무나 복잡하여 우리의 제한된 지적 능력으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사이먼은 주장한다. 우리가 올바른 결정을 내리고자 할 때 흔히 맞닥뜨리게 되는 중요한 문제는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정보를 처리하는 우리 능력의 한계이다. 우리가 처한 현재의 경제 상황을 볼 때 정보가 넘치는 인터넷 시대가 도래했는데도 정작 인간의 의사 결정 능력은 그리 향상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따라서 사이먼의 이론이 옳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

 불확실성의 개념, 혹은 세계의 복잡성에 대해 가장 잘 설명한 사람은 놀랍게도 미국 부시 전 대통령의 첫 번째 임기 당시 국방 장관을 지닌 도널드 럼즈펠드(Donald Rumsfeld)였다. 그는 2002년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관한 언론 브리핑에서 이렇게 말했다. "알려진 기지수들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알려진 미지수들이 있다. 즉 우리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알려지지 않은 미지수들도 있다. 우리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을 말한다." 미국의 '쉬운 영어 운동본부(Plain English Campaign)'는 럼즈펠드의 이 발언에 '2003년의 횡설수설상(2003 Foot in Mouth award)'을 수여했다. 아무래도 '쉬운 영어 운동본부'는 럼즈펠드의 이야기가 인간 합리성이라는 문제를 얼마나 잘 꿰뚫어 보는 말이었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렇게 세상이 복잡하고, 세상을 이해하는 우리의 능력도 그렇게 제한되어 있다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허버트 사이먼의 대답은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의 범위와 복잡성을 줄이기 위해 선택의 자유를 의도적으로 제한하자는 것이다.

 이 말은 난해하게 들릴지 모르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바로 우리가 늘 하는 일이다. 우리 중 대다수는 너무 많은 의사 결정을 너무 자주 해야 할 필요가 없도록, 즉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해 우리 삶에 '규칙적 일과(routines)'를 도입한다. 물론 몸 상태나 처리해야 할 일에 따라 수면 시간과 아침 식사 메뉴가 달라져야 하지만, 적어도 주중에는 대부분 같은 시간에 잠자리에 들고, 같은 시간에 일어나며, 아침 식사로 비슷한 메뉴를 먹지 않는가. (...)

 그래서 사람들은 일상생활이나 체스 게임에서 '일상적으로 움직이는 행동 패턴'을 만들어 내고 기업은 '일정한 생산 공정'을 만들어 내는데, 이는 선택의 폭과 고려해야 할 경우의 수를 단순화하기 위해서이다. 기업들은 일정한 의사 결정 체계, 공식 규정, 관례 등을 만들어서 검토하지 않은 경영 대안이 더 높은 이윤을 낼 확률이 있음에도 의도적으로 대안의 수를 줄인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정보의 바다에 빠져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회에서도 사람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선택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비공식적 규칙들이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줄을 서는 관습이 바로 그것이다. 만약 이런 관습이 없다면 붐비는 버스 정류장에서 시민들은 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지금 자기들이 서 있는 위치가 버스를 먼저 타는 데 가장 유리한지 계산하고 또 계산해야 할 것이다.

<p.232, Thing 16 우리는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도 될 정도로 영리하지 못하다>

 

 우선 모든 교육이 생산성 향상을 목표로 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자.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 중에는 대다수 노동자의 생산성 향상에 간접적으로라도 영향을 전혀 주지 않는 과목이 많이 있다. 문학, 역사, 철학, 음악 등이 그 예일 것이다. 순전히 경제적인 면에서만 본다면 이런 과목들을 가르치는 것은 시간 낭비이다. 다만 우리가 아이들에게 이런 것들을 가르치는 이유는 그런 과목이 아이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그들을 더 나은 시민으로 길러내는 데 도움을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교육을 포함한 모든 것을 생산성 향상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로 가늠하는 시대에 풍요로운 인생이니 더 나은 시민이니 운운하는 것이 점점 공격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알지만 이 이유들이야말로 교육에 투자해야 하는 중요한 (내 생각에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p.242, Thing 17 교육을 더 시킨다고 나라가 더 잘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스위스 패러독스' 역시 교육의 생산성 향상 효과가 낮다는 사실로 설명된다. 그러나 초중등 교육의 생산성 향상 효과가 낮은 것은 이 시기의 교육이 자아실현, 모범 시민 양성, 민족 정체성과 같은 것을 함양하는 데 더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라면, 고등 교육의 생산성 향상 효과가 낮은 것은 고등 교육의 기능 중 경제학에서 '분류'라 일컫는 기능이 강하기 때문이다.

 물론 고등 교육은 피교육자들에게 생산성과 관련된 지식을 상당 정도 전수해 주지만, 그것의 또 하나의 중요한 기능은 그 피교육자들이 얼마나 고용에 적합한지 순위를 매기는 것이다. 많은 직종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능력은 일을 하면서 배워 갈 수 있는 전문 지식보다는 전반적인 지능, 의지, 조직적 사고력 등이다. 따라서 대학에서 역사나 화학을 전공하면서 배운 지식은 보험 회사나 교통부 공무원으로 근무할 때에는 거의 쓸모가 없겠지만, 대학을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대학을 가지 않은 사람들보다 똑똑하고, 의지가 강하며, 조직적 사고력이 있다는 신호가 된다. 대졸자를 모집하는 회사는 각 직원의 전문 지식보다는 이런 일반적 능력을 보고 직원을 채용하는 것이다. 대학에서 얻은 전문 지식은 대부분 직장에서 수행할 업무와 별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고등 교육의 중요성이 더 강조되면서 대학을 확장할 만한 여력이 있는 최상층 내지는 중상층 국가들에서는 고등 교육을 둘러싸고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들이 생기고 있다. 대학을 가는 사람들의 비중이 일정 선을 넘어서면 괜찮은 직장을 얻기 위해서는 대학을 가지 않으면 안 되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가령 국민의 50퍼센트가 대학 진학을 한다면 대학을 가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이 능력 분포도의 아래쪽 절반에 속한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그렇게 되면 일자리를 구하는 데 애를 먹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 일하는 데에 하등의 쓸모가 없는 것을 배우면서 '시간 낭비'를 하게 되리라는 걸 잘 알면서도 대학을 가게 된다. (...)

 이 나라들의 고등 교육 현실은 영화관에서 화면을 더 잘 보려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장면을 생각나게 한다. 한 사람이 서기 시작하면 그 뒷사람도 따라서 서게 되고, 그러다가 일정 비율 이상의 사람들이 서면 결국 모두가 서서 영화를 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 말이다. 영화관에 있는 사람들은 이제 화면을 더 잘 볼 수도 없으면서 앉아서 보지도 못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p.248, Thing 17 교육을 더 시킨다고 나라가 더 잘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옳은 주장이다. 어떤 사람이 자라난 환경만으로 그 사람의 성취를 설명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인생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이 주장이 옳기는 하지만 이것은 큰 그림의 한 조각에 불과하다. 인간은 진공 상태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각자 처한 사회 경제적 환경은 개인의 성취에 심각한 제약으로 작용한다. 심지어 환경은 개인이 무엇을 성취하기를 원하는지에까지도 제약을 가할 수 있다. 환경 때문에 우리는 어떤 일들은 시도해 보기도 전에 포기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공부를 아무리 잘해도 영국의 노동자 계층 출신 학생들은 대학에 갈 생각도 안 하는 경우가 많다. '대학은 자기한테 안 어울리는 곳' 이라는 이유에서이다. 이런 태도가 점점 없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나는 아직도 1980년대 말에 BBC에서 본 다큐멘터리를 잊을 수가 없다. 인터뷰에 나온 광부 아버지와 어머니가 대학에 가서 교사가 된 아들을 '계급의 배반자'라고 비난하는 내용이 든 다큐멘터리였다.

<p.284, Thing 20 기회의 균등이 항상 공평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 이론적으로는 알레한드로 톨레도(Alejantro Toledo) 전 페루 대통령처럼 가난한 마을 출신 구두닦이 소년이 스탠포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따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톨레도 같은 사람이 하 명 있다면 고등학교 문턱에도 못 가본 페루 어린이들은 수백만 명에 이른다. 물론 톨레도 전 대통령이 증명했듯이 노력만 하면 스탠포드도 갈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한 나머지 수백만 명의 페루 아이들은 하나같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게으름뱅이라고 일축해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툴레도 대통령의 사례가 예외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타당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결국 부모 소득이라는 결과의 균등이 어느 정도 선까지 보장되지 않으면 가난한 사람들은 기회의 균등을 충분히 활용할 수가 없다.

<p.287, Thing 20 기회의 균등이 항상 공평한 것은 아니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이런 상황을 고려해서 보수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다. 과학자나 엔지니어가 되면 삼성이나 현대와 같은 대기업에 취직을 하더라도 40대에 실직을 할 염려가 있다는 계산을 하는 것이다. 국내총생산 대비 공공 사회 지출이 선진국 중 가장 낮을 정도로 한국의 복지 제도가 취약한 것을 감안하면 실직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악몽이다. 취약한 복지 제도는 예전에는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평생 고용을 보장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생 고용이 사라진 이제 실업은 치명적인 문제가 되었다. 직장을 잃으면 당장 생활이 어렵게 될 뿐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일자리를 다시 얻을 가능성마저 아주 낮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유망한 한국의 젊은이들과 그들의 장래에 대해 조언하는 부모들은 의사 면허라도 따 놓으면 은퇴할 때까지 일자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최악의 경우에도 (의사 치고는) 돈을 많이 못 벌더라도 직접 병원 개업이라도 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한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머리가 좀 있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의학을 공부하기를 원하고, 혹 인문 계열 학생이라면 변호사 자격증을 딸 수 있는 법학을 전공하기를 원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점에 대해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나는 의사를 무척 존경한다. 내 생명의 은인들이기 때문이다. 몇 차례 대수술을 해서 생명을 구한 적도 있고, 병에 걸릴 때마다 의사들의 치료 덕에 회복했다. 하지만 이런 내가 보기에도 이공 계열 학생의 80퍼센트가 의사 체질이라는 것은 믿기 어렵다. 결국 선진국 중 가장 유연하다는 한국 시장에서 인적 자원을 재능에 따라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데 극적인 실패를 하고 만 것이다. 이유는? 바로 높아진 고용 불안이다.

<p.293, Thing 21 큰 정부는 사람들이 변화를 더 쉽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위 예들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직업 안정성이 낮으면 사람들이 열심히 일을 할지는 몰라도 자기에게 맞지 않는 자리에서 열심히 일한다는 문제가 있다. 과학자나 엔지니어가 되면 대성할지 모를 유망한 청년들이 모두 해부학 교실에서 씨름을 하고 있다. 적절한 재교육을 받으면 생명공항과 같은 '유망 산업'에서 일할 수 있는 미국 노동자들이 자동차 산업 같은 '사양 산업'에서 악착같이 일자리를 고수하고 있지만, 이는 단지 피할 수 없는 대세를 약간 지연시키는 것일 뿐이다.

<p.296, Thing 21 큰 정부는 사람들이 변화를 더 쉽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금융 발전이 자본주의의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해 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모든 형태의 금융 발전이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금융 자본이 경제 발전에 필수적이었던 이유는 산업 자본보다 훨씬 유동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금융 자본은 생산을 저해하거나 심지어 파괴적일 수도 있다. 공장 소유주 편에서 생각해 보자. 예상치 못했던 추가 주문을 받아 원자재나 기계를 더 구매할 자금이 갑자기 필요하게 되었다. 가진 돈은 당초의 주문에 따라 공장 건설, 기계 및 원자재 구입 등에 모두 투자한 상태이다. 그런데 추가로 자금을 투입하면 이윤을 더 거두리라는 것을 알고 은행이 기계와 공장을 담보로 자금을 빌려 주겠다고 나선다면 그는 은행을 무척 고맙게 여길 것이다. 이번에는 그 공장주가 새로운 분야의 사업을 시작하고 싶어 공장의 절반을 팔려고 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건물과 생산 라인의 절반을 사겠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때 공장에 대한 주식을 발행한 뒤 이 중 절반을 팔아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공장주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금융 부문은 건물과 기계 같은 비유동성 자산을 대출금, 주식 등의 유동성 자산으로 전환할 수 있게 해 줌으로써 기업이 성장하고 사업 영역을 다각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금융 자산이 나머지 경제 전체에 잠재적으로 부정적인 작용을 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 유동성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공장을 짓는 데에는 몇 년까지는 몰라도 최소 몇 개월이 걸린다. 세계적 기업 하나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기술적, 조직적 노하우를 축적하는 데에는 수십 년이 걸린다. 이와 대조적으로 금융 자산은 다른 곳으로 옮겨 재배치되는 데 몇 초, 길어야 몇 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이 엄청난 유동성의 차이로 인해 심각한 문제가 빚어지는데, 이는 금융 자본이 '기다리는 것을 싫어하는(impatient)' 자본으로 단기간에 이익을 챙기려는 속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여러 가지 문제가 불거진다. 우선 단기적으로는 경제가 불안해진다. 우리가 최근 목격한 바대로 유동성 높은 금융 자본이 아무런 경고도 없이, 그것도 대단히 '비합리적'인 방법으로 국적과 산업 부문을 가리지 않고 옮겨 다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장기적인 부작용이다. 금융의 높은 유동성은 생산성 상승을 약화시킨다. 기업(산업)의 생산성을 높이려면 장기적이고 안정적으로 자금을 조달해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금을 제공하는 금융 자본은 '기다리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장기 투자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기가 어려워진다. 최근 수십 년 동안 '금융 심화도' (국민총생산에 대한 금융 자산 총액의 비율)가 엄청나게 높아졌는데도 경제 성장이 실질적으로 지체되고 있는 것은 이런 점들 때문이다.

<p.313, Thing 22 금융 시장은 보다 덜 효율적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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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흔히 가지고 있는 경제학에 관한 고정관념을 하나씩 예시를 들어가며 깨는 책이다. 경제학이라는 학문(또는 자본주의)에 대해 마치 정답이나 정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 책과 관련하여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나는 군에 입대하고 자대 배치를 받은 뒤부터 인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계기라고 할 만한 사건이 있었는데 내무실에서 다 같이 TV를 보던 어느 날이었다. 채널을 돌리다 어쩌다 뉴스를 보게 됐다. 무슨 사건에 대한 뉴스였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선후임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던지며 얘기를 시작했다. 정치와 경제, 진보와 보수에 대한 얘기였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그 얘기들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삼권분립도 잘 몰랐고, 진보와 보수가 어떻게 나뉘는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당시 선후임들은 대부분 경제학이나 경영학을 전공한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이 내게 진보와 보수에 대해 알려줬다. 그리고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을 때 나는 그저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런 거 잘 몰라, 관심도 없고..."

 학창시절부터 과학을 좋아했고 고등학교도 자연스레 이과로 진학한 나는 인문학에 대해 배울 기회가 없었다. 아니 분명 중학교와 고등학교 1학년 때 정치와 사회, 경제 등 기본 과목에 대한 수업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는 것이 목적이었던 공부에서 그것들은 내게 외우기 힘들고 골치 아픈 암기과목에 불과했다. 게다가 교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이었는지 집에서도 사회 문제나 정치에 대한 얘기는 나눠본 기억이 없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다 썩었고, 정부가 하라는 대로 하면 되고, 시끄러운 정치와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오히려 관심을 두지 않는 초연한 태도를 갖는 것이 더 멋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랬던 내가 그때, 나와 나이도 비슷하고 처한 상황도 비슷한 사람들이 각자의 생각을 자신 있게 표현하는 가운데, 나는 아무 생각이 없음을 드러냈던 것이 돌이켜보니 창피했던 것이다. 똑같은 군복을 입고 똑같은 일을 했기에 막연히 나와 비슷한 사람들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들의 대화를 통해 '찐' 모습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그래서 그때 이후로 나는 정치와 경제, 철학에 대한 책을 조금씩 읽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소설이나 과학에 대한 책만 읽었었는데 이래서는 다른 사람들과 대화가 어려울 것 같았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경제 공부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한국경제신문을 읽으며 TESAT 시험을 보기도 했다. 내 인생에 있어서는 꽤나 중요한 터닝포인트라고 할 수 있는 일이다.

 만약 그 때도 내가 외골수처럼 '나는 정치나 사회에 대해 관심 없어. 열심히 내 분야만 공부하고 취업해서 돈 벌고 결혼해서 살래'라고 생각했다면 지금 어땠을까. 아마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지금과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지금처럼 그럭저럭 먹고살며 지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내 머릿속 지식의 넓이는 큰 차이가 생겼을 거라고 확신한다. 내가 좋아하는 과학에만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잘 모르는 인문학에 관심을 두지 않는 건 쉽고 편한 일이다. 내가 잘하는 분야, 내가 좋아하는 분야에 대한 공부는 익숙하고 재미있는 반면, 내가 잘 못하는 분야나 관심 없는 분야에 대한 공부는 어렵고 재미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익숙하지 않은 불편함과 잠깐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나면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은 더 넓어지고 다양한 사고가 가능해진다. 그리고 나는 이 점이 우리가 삶을 살아감에 있어 새로운 지식을 대할 때 가져야 할 매우 중요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아마 앞으로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욱 더 편하고 익숙한 것만 찾으려 할 것이다. 이것은 내가 지금껏 보고 듣고 느끼고 배운 것들을 토대로 확립된 내 세상에 안주하려는 모습이다. 그러나 작가 채사장이 그의 책에서 늘 얘기했듯이 나를 불편하게 하는 지식이 나를 성장시킨다. 내 세상에서 나서는 순간의 불편함을 이겨내야 다른 세상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앞으로도 나는 나를 불편하게 하는 지식을 받아들일 용기를 계속 가지고 있기를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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