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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와 아이 사이 > 하임 기너트, 1965

by Ditmars 2023. 10. 19.

<부모와 아이 사이> 하임 기너트, 1965

 

 "부모가 되지 말고, 부모로서 인간이 되시오."

<p.8>

 

 아이들과 좋은 인간 관계를 맺고 좋은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부모들에게 특별한 방법이 필요하다. 외과 의사가 수술실에 들어와서, 마취 전문 의사가 우리에게 주사를 놓기 전에, "사실 난 수술 실습을 많이 받지는 않았지만, 환자들을 사랑해요. 상식에 따라 수술할 거예요." 하고 말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 것인가? 아마도 두려운 나머지 도망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들은 사랑과 상식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믿는 부모들을 두고 그렇게 도망치기가 쉽지 않다. 아이들의 일상적인 요구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려면 부모들도 외과 의사들처럼 특별한 기술을 배워야 한다. 수술 부위에 조심스럽게 칼을 갖다 대는 숙련된 외과 의사처럼, 부모들 또한 말을 기술적으로 사용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말이란 바로 외과 의사의 칼과 같기 때문이다. 말을 통해서 아이는, 육체적인 상처는 아니더라도, 감정적으로 수많은 고통스런 상처를 받을 수 있다.

<p.18>

 

 다음에 나오는 짤막한 대화를 보면, 아버지는 아들의 기분과 불만을 인정해 준다. 그 결과 아들의 분노가 가라앉는다. 야간에 직장에 출근하고, 아내가 낮에 직장에 나가 있을 때 가사를 돌보는 아버지가 장을 보고 집에 돌아와 보니, 여덟 살 된 아들 데이비드가 화가 나 있었다.

 아버지 : 아니, 이게 누구야, 화가 났구나. 정말 화가 무척 많이 났어.
 데이비드 : 나 화났어요. 정말 많이 화났어.
 아버지 : 오 그래?
 데이비드 : (아주 작은 소리로) 아빠가 보고 싶었어요. 학교에서 집에 왔는데, 아빠가 없잖아요.
 아버지 : 네 말을 듣고 보니 기분 좋은데? 알았어, 학교에서 돌아올 때, 내가 집에 있으면 좋겠다는 말이지?

 데이비드는 아버지를 포옹하고 나서, 밖으로 나가 놀았다. 데이비드의 아버지는 아들의 기분을 풀어주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장을 보러 가야 했어. 장을 보지 않으면, 먹을 게 없잖아." 하며 집에 없었던 이유를 변명하지도 않았다. 왜 그렇게 화를 내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아들의 기분과 불만을 인정했다.

 아이들에게 그들의 불만과 생각이 터무니없고 사실과 다른 것이라고 설득하려고 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부모들은 의식하지 못한다. 그런 태도는 말다툼만 일으키고, 기분만 상하게 할 뿐이다.

<p.30>

 

 부모도 그렇지만, 아이들도 감정을 함께 나누는 법을 배우면서 자라지 못했다. 심지어는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조차 모를 때도 자주 있다. 불행한 일이다.
 일반적으로 아이들은 극복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화를 내며 다른 사람들을 비난한다. 그럴 때, 부모들은 보통 화를 내며 아이들을 나무라고, 나중에 가서 후회할 소리를 퍼붓는다. 물론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아이들은 감정을 함께 나누는 데 서툴다. 그러므로 그들이 분노의 분출을 숨기기 위해 드러내는 두려움과 절망, 무력감의 소리를 듣는 법을 부모들이 알아두면 유익할 수 있다. 부모들은 아이의 행동에 대해 반응을 보이는 대신에, 당황한 기분에 반응하여, 그것을 극복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좋다. 제대로 느낄 때에만, 아이들은 명확하게 생각하고 제대로 행동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제대로 느낄 때에만 집중하고, 주의를 기울이고, 귀담아들을 수 있다.

<p.41>

 

 어린이들이 던지는 많은 질문들의 이면에는 확신을 얻고자 하는 욕망이 숨어 있다. 그와 같은 질문에 대한 최선의 대답은, 우리의 관계는 변함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다.
 아이가 어떤 사건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건 그 자체보다 사건을 둘러싸고 있는 아이의 감정을 깨닫고 그에 반응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p.46>

 

 사람은 자신의 확고한 의견을 바꾸려는 직접적인 시도에 대해서 반발하게 마련이다. (...) 아이가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표현을 했을 때, 그것을 부정하거나 시인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런 태도는 오히려 아이로 하여금 그 생각을 더욱 강하게 주장하게 만들 뿐이다. 
 아이를 가장 잘 도울 수 있는 길은, 아이가 느끼고 있는 감정뿐만 아니라 그 감정이 뜻하는 내용까지도 이해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p.51>

 

 아이들은 부모를 사랑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미워하기도 한다. 부모나 선생님, 또는 자기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든 아이들은 이런 두 가지 감정을 보인다. 이렇게 상반된 감정이 우리 생활에 실제로 존재하는데도 부모들은 이를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 까닭은 자기 마음속에서 이렇게 감정이 서로 어긋나는 것도 마땅치 않은 터에, 아이들의 마음속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하니, 더욱더 이를 인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에 대해서, 특히 가족에 대해서 두 가지 다른 감정을 갖는 것은 뭔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두 갈래 감정이 우리 안에도 있고 아이들에게도 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아량을 가져야 한다. 쓸데없는 갈등을 피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에게 이런 감정이 정상적이고 자연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아이들이 느끼는 죄의식이나 불필요한 걱정을 덜어주는 것이 좋다.

 "내가 보기에 너는 선생님에게 두 가지 감정을 갖고 있어. 좋아하면서도 싫어해."
 "넌 형에게 두 가지 감정을 갖고 있는 것 같구나. 존경하면서도 미워해."
 "너 이 문제에 대해 두 가지 생각을 하는구나. 캠프에 가고 싶어하면서도 집에 있고 싶어해."

 비난하지 않는 말투로 조용히, 아이가 상반된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깨닫게 함으로써 아이를 도와줄 수 있으며, 혼란스런 감정을 순화해줄 수 있다. (...)

 어렸을 때 받은 훈련과 커서 받은 교육은 우리에게 양쪽의 견해에 대한 편견만을 가르쳤다. 부정적인 감정은 모두 나쁜 것이며, 그런 감정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우리는 들었다. 그러나 새로운 과학적 견해에 따르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드러난 행위에 대해서는 좋다 나쁘다 하는 판결을 내릴 수 있지만, 마음속의 행위에 대해서는 판결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행동(conduct) 자체는 비난이나 명령을 받을 수 있지만, 감정은 그럴 수도, 또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감정에 대해 판결을 내리거나, 상상을 검열하는 것은 자유로운 사고와 정신 건강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온다. (...)

 많은 사람들이 교육을 받았지만, 자기들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는 모르는 경우가 많다. 상대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는데, 그것은 다만 싫어하는 것이라고 일러주고, 두려워서 벌벌 떠는데,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일러준다. 마음이 쓰라리고 아픈데, 용감하게 웃어야 한다고 충고해 준다.

<p.54>

 

 비판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비판은 분노와 적대감을 낳는다. 심지어는 그보다 더 나쁠 수도 있다. 정기적으로 비판을 받는 아이들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또 자신의 가치를 의심하고 다른 사람의 가치를 하찮게 여기게 된다. 사람들을 의심하고 인간적으로 파멸하기를 기대하는 어른으로 자란다.

<p.78>

 

 우리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도록 교육받았다. 그래서 감정이 매우 격렬하게 요동치는 한가운데서도 거의 아무런 맞대응을 하지 않았을 때, 이를 제일 자랑스러워한다. 혹자는 그것을 인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들이 부모에게서 배워야 하고, 또 배워서 고맙게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감정에 맞게 행동하는 태도이다. 아이들은 부모에게서 진짜 감정을 비춰주는 표현을 듣고 싶어한다.

 심지어는 어린아이도 부모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서, 모든 비난 가운데 가장 심한 비난, 곧 "엄마 아빠는 날 사랑하지 않아."라는 비난을 퍼붓곤 한다. 이는 드문 일이 아니다. "아냐, 우린 널 사랑해!" 부모는 화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이런 행동은 말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아이를 안심시키지 못한다. 화가 날 때는, 부모도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사랑에 호소함으로써, 아이는 부모로 하여금 변명을 하게 했다. 다시 말하면 초점이 자기 자신에게서 부모로 옮아가도록 했다.

 화가 날 때는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부모들만이 아이들의 비난에 대해서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다.

 "지금은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기에 적절한 시간이 아니야. 무엇 때문에 내가 화가 났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 시간이야."

 부모가 화를 낼수록, 아이들의 마음을 안심시켜야 할 필요는 더 커진다. 하지만 성난 어조로 사랑을 표현해도 아이들에게는 위안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아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전해 주지 못한다. 오로지 혼돈만을 초래할 뿐이다. 아이들에게 들리는 소리가 사랑의 언어가 아니라,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전해 주는 분노이기 때문이다. 분노가 곧 사랑의 포기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두면, 아이들에게 좀더 도움이 될 것이다. 사랑의 감정을 잃는 것은 일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분노가 사라지는 순간, 사랑의 감정은 다시 나타나게 된다.

<p.83>

 

 화를 내지 않겠다는 다짐은 쓸데없는 다짐을 하는 것보다 더 해롭다. 그것은 불에 기름을 끼얹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분노를 태풍처럼, 삶의 일부분으로 인정하고 그것에 대비해야 한다. 평화로운 가정은, 사람들이 바라는 평화로운 세계처럼, 인간 본성이 갑작스럽게 자비롭게 변한다고 해서 얻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긴장이 폭발하기 전에 기술적으로 누그러뜨리는 사려 깊은 과정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감정적으로 건강한 부모들은 성자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그들은 분노를 의식하고, 그것을 존중한다. 분노를 정보의 근원, 상냥함을 보여주는 징조로 활용한다. 그런 부모들의 언어는 감정과 일치한다. 그들은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다음의 일화에서 어머니는 딸에게 창피를 주거나 모욕을 주지 않고, 분노를 발산한다. 그 덕분에 딸은 용기를 얻어 어머니의 말에 따를 수 있었다.

 열한 살 된 제인이 소리를 지르며 집에 들어왔다.
 "야구를 할 수가 없어. 셔츠가 없어!"
 어머니로서는 딸에게 블라우스를 입으라고 하여 문제를 무난하게 해결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제인을 도와 셔츠를 찾아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로 마음먹었다.
 "나 화났어. 정말 기분 나빠. 너한테 야구 셔츠를 여섯 벌이나 사줬어. 그런데 아무 데나 흘려버리거나 잃어버린 거야. 네 셔츠는 네 옷장에 넣어두었어야지. 정 필요하다면, 어디서 찾아야 할지 네가 알아봐."

 나중에 이야기했듯이, 제인의 어머니는 딸에게 창피를 주지 않고 분노를 표현했다.
 "난 한 번도 지나간 일에 대해서 불만을 터뜨리거나 지난 상처를 다시 파헤치지 않았어요. 딸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어요. 딸에게 산만하다거나 무책임하다고 말하지도 않았어요. 그냥 내 기분이 어떤지, 화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어요."
 어머니의 말은 제인이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내는 데 도움을 주었다. 제인은 잊어버리고 체육관의 보관함이나 친구 집에 놓고 온 셔츠들을 서둘러 찾아냈다. (...)

 부모에게 분노는 값비싼 감정이다. 그 값을 다하기 위해서는, 이익이 남는 곳에 그것을 쏟아야 한다. 화가 났다는 사실을 좀더 강조하기 위해 분노를 이용하지는 말아야 한다. 약을 처방하는 것이 병보다 못해서는 안 된다. 분노는 부모에게 위안을 주고, 아이에게는 자신을 바라보게 하고, 양쪽 모두에게 부작용이 없는 방법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p.86>

 

 그와 반대로 다음 일화는 위협에 호소하지 않고도 나쁜 행동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한 예를 보여주고 있다. 일곱 살 난 피터는 어린 동생에게 장난감 공기총을 쏘았다. 어머니는 말했다.
 "아기에게 총을 쏘지 말고 과녁에 대고 쏴."
 그런데 피터는 다시 동생에게 총을 쏘았다. 어머니는 총을 빼앗으며 피터를 타일렀다.
 "총은 사람에게 대고 쏘는 것이 아니야!"
 피터의 어머니는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취했으며, 동시에 바람직한 행동 기준도 어기지 않았다. 아들 피터도 자존심에 상처를 입지 않고, 자기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알게 되었다. 거기에는 분명히 대안이 암시되어 있었다. 과녁을 향해 총을 쏘든지, 총을 빼앗기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이 이야기에서 어머니는 흔히 빠지기 쉬운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 실패가 뻔히 내다보이는 길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피터, 그만두지 못해! 동생에게 총을 쏴서는 안 되는 것 모르니? 과녁은 뒀다가 뭐에 쓰니? 한 번만 더 동생에게 쏴봐, 한 번만 더. 그러면 영영 총을 가지고 놀지 못할 줄 알아."
 온순하지 않은 아이일 경우는, 이런 경고를 받고도 오히려 금지된 행동을 되풀이하는 식으로 대응한다. 그 다음에 어떤 광경이 펼쳐질지에 대해서는 굳이 말할 필요조차도 없다. 부모라면 누구든 쉽게 이런 잘못에 빠져든다.

<p.104>

 

 이미 내용을 알고 있으면서, 아이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예를 들면, 방이 지저분한 것을 쳐다보면서, "내가 말한 대로 방 청소는 했니?"라거나, 딸이 결석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오늘 학교에 갔었니?"라고 묻는 것이 그렇다. 그보다는 "아직 방 청소를 안 했더라."라거나, "너 오늘 결석했다던데?"라고 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이들은 왜 거짓말을 하는가? 사실대로 말하면 곤란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네 살 된 윌리가 뛰어들어와 어머니에게 불평을 터뜨렸다.
 "할머니 미워!"
 깜짝 놀란 어머니는 이렇게 대꾸했다.
 "아냐, 그러면 안 돼. 넌 할머니를 좋아하잖아. 우리 집에서는 누굴 미워하면 안 돼. 그리고 할머니는 네게 선물도 주고, 구경도 시켜주잖아.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을 할 수가 있어?"
 그래도 윌리는 고집을 부렸다.
 "싫어. 할머니 미워. 할머니 보기 싫어."
 어머니는 이제는 정말로 화가 나서 좀더 엄격한 방법으로 아이를 교육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머니는 윌리의 엉덩이를 때렸다. 더 맞기가 싫었는지 윌리는 마음을 바꿨다. 
 "나 정말 할머니가 좋아."
 이때 어머니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윌리를 껴안고 입을 맞추었고, 착한 아이라며 칭찬해 주었다.

 이 거래에서 꼬마 윌리는 무엇을 배웠을까? 어머니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있는 그대로 감정을 드러내면 위험하다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 사실을 거짓 없이 이야기하면 벌을 받고, 거짓을 말하면 사랑을 받는다. 진실을 말하면 상처를 입는다. 진실을 멀리하라. 엄마는 거짓말하는 아이를 사랑한다. 엄마는 듣기 좋은 이야기만을 듣고 싶어한다. 느낌을 그대로 말하지 말고, 엄마가 듣고 싶어하는 소리만 말해야지.

 윌리에게 진실을 말하라고 가르치고 싶다면 어머니는 어떻게 대답을 했어야 했을까? 아들의 분노를 인정했어야 했다.
 "응. 이젠 할머니를 좋아하지 않는구나. 무엇 때문에 할머니에게 그렇게 화가 났는지 말해 주지 않을래?"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아기한테 선물을 줬어. 나한테는 안 주고."
 아이에게 정직을 가르치려거든, 듣기 좋은 진실뿐만 아니라 귀에 쓴 진실도 귀담아들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아이들이 정직하게 자라려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또는 두 가지가 혼합된 것이든, 감정에 대해서 거짓말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 아이들은 자기들이 표현한 감정에 대해서 우리가 드러내는 반응에 따라, 정직한 행동이 최선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게 된다.

<p.116>

 

 한 마디로 하면, 부모는 아이들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도록 부추기지 말아야 하며, 아이에게 거짓말할 기회를 일부러 만들어주지 말아야 한다. 아이가 거짓말을 한다고 해서 신경질을 부리거나 융통성 없이 굴어서도 안 된다. 사실에 근거하여 현실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아이들이 깨우치는 것이다.

 아이들이 거짓말을 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또다른 방법은 "왜?"라고 묻지 않는 것이다. 옛날에 "왜"는 연구할 때 쓰는 용어였다. 그 의미는 오래 전에 사라져버렸다. "왜"를 비판의 무기처럼 악용한 결과, 그 의미가 타락하고 말았다. "왜?"라고 물으면, 아이들은 부모가 찬성하지 않고, 실망하고 있으며,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간주한다. 그것은 아이들에게 전에 들었던 꾸중의 메아리를 다시 울리게 해준다. 단순히 "왜 그랬니?"라고 하는 말도 "세상에, 왜 너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했니?"라는 의미로 들릴 수 있다.
 현명한 부모는 다음과 같이 해로운 질문을 하지 않는다.

 "왜 넌 그렇게 이기적이니?"
 "왜 넌 내가 말한 것은 죄다 잊어먹니?"
 "왜 넌 늘 시간을 지키지 않니?"
 "왜 넌 그렇게 어수선하니?"
 "왜 넌 입을 다물고 있지 못하니?"

 아이가 대답할 수 없는 수사적인 질문 대신에, 동정심을 표현하는 말을 하는 것이 좋다.

 "네 것을 나눠주면 존이 좋아할 텐데."
 "기억하기 힘든 것들이 있긴 해."
 "네가 늦으면 걱정되더라."
 "차분하게 하기가 쉽지는 않아."
 "넌 아이디어가 많아."

<p.120>

 

 병에 넣어둔 과자를 훔쳐 먹고 코 밑에 설탕가루를 묻히고 다니는 아이에게 이렇게 물어서는 안 된다.

 "누가 병 속의 과자를 먹었니?"
 "혹시 누가 먹었는지 봤니?"
 "네가 먹었구나! 그렇지?"

 이런 질문은 아이로 하여금 거짓말을 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므로, 결국 부모들만 더 상처를 입을 뿐이다. 무슨 대답을 할지 뻔히 알면서 질문을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철칙이다. 오히려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너 먹지 말라고 했는데, 과자를 먹었구나."

 이런 표현 자체가 적절하고도 바람직한 처벌이 된다. 이런 말을 들으면 아이는 마음이 편하지 않고, 잘못된 행동에 대한 대가로 뭔가를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p.123>

 

 지금 당장이라도 분명하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 있다. 인성 교육은 아이들과 우리의 관계에 달려 있으며, 성품은 말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 전달된다는 사실이다. 장기 프로그램의 첫 단계는 다음과 같이 다짐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아이들의 생각과 감정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며, 겉으로 드러난 행동, 곧 고분고분하거나 반항하는 태도에 대해서 대응하지 않고, 그런 행동을 유발하는 감정에 대처하겠다는 다짐에서 출발해야 한다.

<p.135>

 

 부모는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면, 숙제는 엄격히 말해서 아이와 교사의 책임이라는 태도를 보여주어야 한다. 숙제에 대해 잔소리하지 말아야 한다. 아이들이 부탁하기 전에 숙제를 검사하거나 조사하지 말아야 한다. 부모가 숙제에 대한 책임을 떠맡으면, 아이들은 기꺼이 맡긴다. 그러면 다시는 이 짐을 벗어던질 수가 없다. 숙제가 아이들 손에서 부모를 비난하고, 협박하고, 이용하는 무기가 될 수도 있다. 부모는 숙제의 세세한 내용에 대해 관심을 줄이는 대신, 아이에게 "숙제는 네 책임이야."라고 명확하게 말해 두어야 한다. 그러면 많은 재앙이 사라지고, 그만큼의 즐거움이 가정에 더해진다. 일이 부모의 책임이듯이, 숙제는 아이의 책임인 것이다. (...)

 숙제의 핵심 가치는 아이에게 스스로 공부하는 경험을 갖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치를 갖기 위해서 숙제는 아이의 능력에 맞아야 한다. 그래야 아이가 다른 사람의 도움을 거의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공부를 할 수 있다. 숙제를 직접 도와주는 것이 아이에게는 부모가 관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만을 느끼게 해줄 수도 있다.

<p.153>

 

 성장하고 성숙하기 위해서 아이에게는 자기가 자기 나름의 인격을 가지고 있으며, 부모와는 구별된 존재라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 부모가 학교 성적에 너무나 열띤 관심을 가지고 개입하면, 아이의 자율성이 침해된다. 숙제를 잘해서 받는 좋은 성적이 부모의 왕관에 박히는 다이아몬드가 되는 걸 보면서, 아이는 은연중에 잡초로 된 왕관을 집에 가져가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것은 자기 자신의 왕관이 될 테니까 말이다. 부모의 목표를 좌절시킴으로써, 어린 저항가는 자립심을 획득한다. 자기만의 인격과 성품을 갖추려면 실패도 경험해 보아야 한다. 부모가 압력을 가하고 벌을 주더라도 그렇다. (...)

 부모의 목표는 아이들에게 그들이 부모와는 다른 개인이며, 그렇기 때문에 성공과 실패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데 있다. 자기 자신을 자발적인 욕구와 목표를 지닌 한 개인으로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아이는 자신의 삶과 그 삶의 요구에 대해서 책임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p.158>

 

 훌륭한 부모라면, 훌륭한 교사처럼, 아이들에게 점차 필요치 않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부모들은 아이가 스스로 선택을 내리고, 자기 힘을 발휘하도록 이끌어주는 안내자가 되어야 하며, 거기서 만족을 느껴야 한다. 아이들과 대화를 나눌 때는, 아이들에게 자기 힘으로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부모의 마음을 보여주는 표현을 의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p.177>

 

 대부분의 부모들은 아이들을 사랑한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부모들에게는 하루의 매 순간마다 아이들에게 사랑을 받아야 할 절박한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결혼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나,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아이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처지가 불리하다. 아이들에게 사랑을 받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부모들은, 아이들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다. 집에서 아이들의 행동을 통제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부모가 자기들에게 사랑을 받고 싶어한다는 것을 눈치채면, 아이들은 이를 가차 없이 악용한다. 불안에 떠는 하인을 다스리는 독재자가 되는 것이다.

<p.186>

 

 너그러움의 본질은 아이들을 일체의 감정과 소망을 누릴 수 있는 헌법적 권리를 가진 인간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는 절대적이며, 거기에는 제한이 없다. 일체의 감정과 상상, 사고, 희망, 꿈과 욕망은 그 내용에 관계 없이, 적절한 수단을 통하기만 하면, 인정받고, 존중받고, 표현을 허락받을 수 있다. 물고기는 헤엄치고, 새는 비상하며, 인간은 느낀다. 어린이들이 어떤 느낌을 갖는 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이런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어린이들에게는 감정이 아니라, 오로지 행동에 대해서만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것이다. 파괴적인 행동은 용납되지 않는다. 그런 행동이 발생하면, 부모들이 관여하여, 그것을 말과 그밖의 다른 상징적 출구로 배출할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아주어야 한다.

<p.188> 

 

 근사한 옷 가게의 진열장에 걸린 값비싼 아름다운 옷을 보고 감탄하고 있는 당신을 보면서 남편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무슨 일이야? 뭘 보고 있는 거야? 당신도 알다시피, 우린 경제적으로 어렵잖아. 무슨 수를 써도 저렇게 값비싼 물건을 살 능력이 없어."

 이런 말을 듣고도 사랑스런 감정이 우러나지는 않을 것이다. 괜히 부아가 치밀며 기분만 언짢아질 것이다. 하지만 남편이 당신의 소원을 인정해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면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여보, 저렇게 근사한 옷을 살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당신이 저걸 입고, 어울리는 보석을 달고, 어깨에 벨벳 망토를 걸치고 있다고 생각해 봐. 정말 멋있을 거야. 아무리 화려한 파티에 가더라도 당신과 함께 갈 수 있다면 전혀 기죽지 않을 거야."

 불행한 일이지만, 이런 반응이 온다고 해서 옷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두 번째 남편의 태도는 마음에 상처를 주거나, 부아를 치밀게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커질 것이다.

<p.198>

 

 아이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일일히 따지고 들거나 말을 많이 해서는 안 된다. 부모의 제지가 공정한지 불공정한지를 놓고 아이들과 토론을 벌일 필요도 없다. 엄마나 아빠가 나서서 장황하게 그것을 설명해서도 안 된다. 동생을 때려서는 안 되는 이유를 아이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 "사람을 때리는 거 아니야."라고 말해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유리창을 깨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 "유리창은 깨라고 있는 것이 아니야."라고 말해 주면 된다.

 부모의 제지를 어기면, 아이의 불안감이 점점 커진다. 보복이나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기 때문이다. 이때 부모는 아이의 불안감을 키워줄 필요가 없다. 강한 의지를 보여주어야 할 시점에서, 부모가 너무 말이 많으면, 약함을 보여준 것이 된다. 이처럼 때로는 어린이에게는 체면을 구기지 않고 충동을 억제할 수 있도록 도와줄 어른 응원군이 필요하다.

<p.204>

 

 체벌의 가장 나쁜 영향 중 하나는, 그것이 아이의 양심의 발달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체벌은 죄책감에서 너무나 쉽게 벗어나게 만든다. 잘못에 대한 대가를 이미 지불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이는 그런 행동을 되풀이해도 괜찮다고 느낀다.

<p.211>

 

 영리한 사람은 구덩이에서 나오는 방법을 알고 있지만, 현명한 사람은 아예 구덩이에 빠지지를 않는다.

<p.222>

 

 '절대로'나 '늘'은 아이들이 즐겨 쓰는 말이다. 아이들은 극단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검은색이나 흰색보다는 회색이 더 일반적이라는 것을 경험한 부모라면, 아이들이 그와 같은 표현을 쓰지 않도록 가르칠 수가 있다.

<p.224>

 

 한 저명한 심리학자의 말에 따르면, 사람들이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동안에 몰입이라고 하는 시각적인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 절대 아니라고 한다. 어느 정도 해결 가능성이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 사람이 가진 능력을 모두 다 쏟아부을 때가 발전에 가장 좋은 조건이 된다고 한다. 시를 쓰거나, 짧은 이야기를 짓거나, 진흙으로 조각을 빚거나, 블록으로 성을 쌓는 것이 어린이들에게는 바로 그런 조건을 의미한다. 형제들과 연극을 꾸미거나, 친구들과 모험을 하는 것도 이에 해당될 수 있다. 발전과 만족은 멍하니 텔레비전을 바라보는 것보다 노력을 집중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더 크다.

<p.233>

 

 다섯 살 된 버지니아는 어머니가 아기를 가진 것을 알고는, 매우 기뻐했다. 남자 동생의 모습과 함께 햇살과 장미를 그림으로 그렸다. 어머니는 이처럼 한 면으로 치우친 아이의 생각에 맞장구치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해 주었다.

 "어떨 때는 동생이 있어 재미있기도 하겠지만, 어떨 때는 귀찮기도 할 거야. 때로는 아기가 울면, 성가시기도 할 거야. 자기 침대에 오줌을 싸고, 기저귀에 똥도 쌀 테고, 나는 아기를 씻기고, 젖을 먹이고, 보살펴주게 될 거야. 그럼 넌 따돌림받는다는 느낌이 들기도 할 거야. 질투심이 나기도 하고. 너 혼자 이런 말을 하기도 할 거야. '엄마는 이제 날 사랑하지 않아. 아기만 사랑해.' 그런 생각이 들면, 꼭 엄마한테 와서 말해. 그럼 내가 그 동안 주지 못했던 사랑을 줄 테니까. 그러니 걱정하지 마. 너도 엄마가 널 사랑한다는 걸 알게 될 거야."

 어떤 부모들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망설인다. 아이 머릿속에 위험한 생각을 넣어주는 것은 아닐까 하여 두려워한다. 그런 생각이 아이에게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런 부모들은 안심해도 된다. 그렇게 말하면, 아이는 부모가 자기 마음을 이해해 준다고 생각한다. 그런 말은 아이에게 죄책감을 씻어주고, 친밀감이 생기게 해주며, 의사 소통을 도와준다. 새 아기가 태어나면 아이는 분노와 적대감을 느끼게 되어 있다. 아이가 말없이 시무룩하게 지내는 것보다, 걱정거리를 스스럼없이 털어놓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p.242>

 

 

자주 보면, 모든 아이들에게 사랑을 절대적으로 공평하게 나누어 주고 싶어하는 부모들이 결국은 아이들 모두에게 화를 내고 만다. 무게를 달아서 공평하게 대하려고 하면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 있다. 어머니가 다른 아이들의 반대가 두려워 한 아이에게 더 큰 사과를 주거나, 더 힘있게 안아주지 못한다면, 생활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워진다. 감정이든 물질이든, 그 무게를 달아서 주려고 애쓰다 보면, 힘도 들고 화도 날 수 있다. 아이들은 사랑을 똑같은 분량으로 받고 싶은 것이 아니다. 아이들을 사랑할 때는 공평함이 아니라, 특별함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공평한 사랑을 중시할 것이 아니라, 사랑의 질을 중시해야 한다.

 우리는 아이들을 모두 똑같은 방법으로 사랑해 주지 않는다. 또 똑같이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우리는 아이에 따라 나름대로 특별하게 사랑한다. 그것을 감추려고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부모가 아이에 따라 사랑에 차이를 두지 않으려고 신경 쓸수록, 아이들은 혹시 사랑을 공평하지 않게 나눠주는 경우는 없나 하고 더욱더 경계하게 된다.

 자진해서, 또 마지못해서, 부모들은 아이들이 걸핏하면 내세우는 "공정하지 못해."라는 주장에 대해 변명을 하게 된다. 아이들의 주장에 말려들어가면 안 된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변명하거나, 본래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고 주장하거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반박할 필요도 없다. 상황을 설명하거나 부모의 처지를 변명하고 싶더라도 참아야 한다. 부모의 결정이 공정했느니, 그렇지 않았느니 하는 밑도 끝도 없는 말싸움에 끌려들어가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공평함을 기한다는 명목으로 부모의 사랑을 골고루 배급하거나 나눠주라는 강요에 밀리지 말아야 한다.

 각 아이에게 균등한 사랑이나 똑같은 사랑을 주려고 하지 말고, 아이마다 그와 부모의 관계가 특별하다는 점을 각인시켜 주어야 한다. 어느 한 아이와 몇 분이나 몇 시간을 함께 지낼 때는, 온통 그 아이에게만 몰두해야 한다. 그 시간 동안에 아들은 자기가 부모의 유일한 자식이고, 딸은 자기가 유일한 자식이라는 기분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어느 한 아이를 데리고 외출할 때는, 다른 아이에게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한다. 다른 아이들에 대해서는 이야기도 하지 말고, 선물도 사지 않는 것이 좋다. 그 순간만큼은 아이에게 기억에 남을 수 있도록, 부모가 모든 관심을 쏟아주어야 한다.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다는 욕심을 부모가 인정해 주면, 아이는 안심하게 된다. 그런 욕심을 부모가 이해하고 동정해 주면, 아이는 위안을 얻는다. 각각의 아이가 지닌 특별함을 인정해 주면, 아이들은 용기를 얻는다.

<p.253>

 

 아이들이 불필요한 죄책감을 갖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 잘못을 저지른 아이들을 대할 때, 부모는 숙달된 정비공이 고장난 자동차를 다루듯 다루어야 한다. 정비공은 자동차 주인에게 창피를 주지 않는다. 어디를 어떻게 수리해야 하는지만 지적한다. 그는 소음이 들리고 덜컹덜컹거리고 삐걱거리는 소리가 난다고 해서 자동차를 탓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소리를 이용하여 자동차의 상태를 파악한다. 즉 자동차의 고장 원인이 무엇인지 따져본다.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생각을 드러내고 나서도 부모의 사랑과 인정을 잃을 위험이 없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알고 있는 아이들은 거기서 커다란 위안을 얻는다.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좋다.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난 달라.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이 서로 달라.", "네게는 네 생각이 옳은 것 같지만, 내 의견은 달라. 네 견해를 존중하지만, 내 견해는 그게 아니야."

 고의는 아니겠지만, 부모들은 장황한 소리를 늘어놓고 불필요한 설명을 하여 아이들에게 죄책감을 일으키는 경향이 있다. 미숙한 아이가 복잡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에도, 꼭 아이의 동의를 얻어서 일을 처리해야 한다고 믿는 부모들이 특히 그렇다.

<p.264>

 

 책임지도 어떤 행동을 준비하고 있는데 못 하게 하면, 아이들은 마음속에서 반항심과 분노를 드러낸다. 어린아이들은 어떤 일을 능숙하게 해내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운동화 끈을 매고, 외투의 단추를 채우고, 병 뚜껑을 열고, 문고리를 돌릴 수 있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때 아이들을 도와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너그럽게 기다리면서, 일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가볍게 한 마디 해주는 것이다.

 "점퍼 입는 게 쉬운 일이 아니야.", "저 병 뚜껑은 열기가 힘들어."

 노력이 성공을 거두든, 실패하든, 이런 말은 아이에게 도움이 된다. 성공을 거두면, 아이는 어려운 일을 잘 해냈다는 것을 알고 만족감을 갖는다. 혹시 실패를 하더라도, 그 일이 어렵다는 사정을 부모들도 알고 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어느 경우든 부모의 공감과 협조를 경험한 아이는, 부모에게 더욱더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 그 일을 해내지 못했다고 해서 아이는 자기가 무능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아이의 생활을, 어른들에게 필요한 효율을 기준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효율은 유년기 아이들에게는 적이다.

 아이들의 감성의 경제를 고려할 때, 효율에는 너무나 커다란 손실이 따른다. 효율은 아이의 자질을 고갈시키고, 성장을 방해하며, 관심을 억눌러, 결과적으로 아이를 감성적으로 완전히 파괴할 수도 있다. 아이들에게는 마음껏 실험하고, 힘껏 노력하고,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한다. 그런 아이들을 재촉하거나 무안을 주지 말아야 한다.

<p.266>

 

 사랑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두 사람의 삶의 질을 높여주는 태도의 체계이자 연속된 행동이다. 낭만적인 사랑은 가끔 맹목적일 때가 있다. 그것은 사랑받는 사람의 강점은 인정하면서도, 약점을 보지는 못한다. 반대로 성숙한 사랑은 약점을 거부하지 않으면서 강점을 받아들인다. 성숙한 사랑을 할 때는 남자나 여자 모두 상대를 이용하거나 소유하려고 하지 않는다. 각자는 자기 자신의 소유일 뿐이다. 그런 사랑은 상대에게 자신의 가장 훌륭한 점을 펼치고, 가장 훌륭한 자신이 될 수 있게 하는 자유를 준다.

<p.298>

 

 어떤 행동이 용납이 되고, 어떤 행동이 용납이 되지 않는지, 아이들은 명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부모의 도움 없이 아이들이 충동과 욕망을 행동에 옮기기란 어려운 일이다. 부모의 허락을 받을 수 있는 행동의 분명한 한계를 알게 되면, 아이들은 훨씬 더 안정감을 느낀다.

 부모들에게는 규칙을 만들고, 행동을 제지하고, 행동에 한계를 정해 주는 것이, 아이들에게는 어떤 행동을 강요하는 것보다 더 쉽다. 아이들이 규칙을 어기면, 부모들은 융통성을 발휘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행복하기 바란다. 규칙을 어기려고 할 때 부모가 이를 허락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부모에게 아이들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게 하고, 죄책감을 느끼게 만든다.

<p.310>

 

 비난하지 말고, 길잡이를 해주어야 한다. 문제를 이야기하며 가능한 해결책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아이 자체에 대해서 부정적인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딸이 도서관에서 빌린 책의 반납 기간이 지난 것을 알게 된 어머니는 화가 나서 딸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저렇게 책임감이 없다니까. 넌 걸핏하면 늑장을 부리고 잊어버리더라. 왜 책을 제때도서관에 반납하지 않을 거야?"

 어머니가 딸에게 길잡이를 해주려고 했다면, 다음과 같이 문제를 이야기하고 해결책을 말해 주었을 것이다.

 "책을 도서관에 반납해야겠더라. 반납 기한이 지났어."

<p.314>

 

 한 젊은 부부가 캘리포니아의 간선 도로의 미로 속에서 길을 잃었다. 두 사람은 통행료 내는 곳에서 경찰에게 말했다.
 "우린 길을 잃었어요."
 경찰이 물었다.
 "여기가 어딘 줄 아세요?"
 "예. 통행료 내는 곳이잖아요."
 "가시려는 곳은 알고 있나요?"
 부부가 한 입으로 대답했다.
 "예."
 경찰관이 결론을 지었다.
 "그렇다면 길을 잃은 게 아니군요. 확실한 방향만 알면 되겠어요."

<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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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도 적었지만 이 책의 첫 부분, 18페이지에 나오는 이야기는 부모 입장에서 정말로 의미심장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외과 의사가 수술실에 들어와서, 마취 전문 의사가 우리에게 주사를 놓기 전에, "사실 난 수술 실습을 많이 받지는 않았지만, 환자들을 사랑해요. 상식에 따라 수술할 거예요." 하고 말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 것인가? (...) 아이들의 일상적인 요구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려면 부모들도 외과 의사들처럼 특별한 기술을 배워야 한다. 수술 부위에 조심스럽게 칼을 갖다 대는 숙련된 외과 의사처럼, 부모들 또한 말을 기술적으로 사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전부터 숱하게 느낀 바지만 우리가 대입이나 취업 등을 위해 공부하고 준비한 시간에 비하면 자녀를 키우기 위해 준비하고 공부한 시간은 상대적으로 매우 적다. 여기서 대입이나 취업이 자녀를 키우는 일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라는 변명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대입이나 취업보다 자녀를 올바르게 키우는 일이 더 중요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가 자녀를 키울 때 고작 책 몇 권 읽고 말거나 주변 사람들의 말에 의지하고 마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지금껏 아이들을 그렇게 키워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너희들 키울 때는 먹고 사느라 바빠서 육아 책이 뭐니, 그래도 알아서 잘 크지 않았니?'라고 하는 부모님 세대들이 있을 것이다. '애들 키우는데 이론은 무슨, 사랑과 관심으로만 키우면 되지.'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둘 다 일부는 맞는 말이지만 이 책에서 자녀를 키우는 부모를 환자를 수술하는 외과 의사로 빗댄 비유에 의하면 그것만으로는 완벽하지 않는 듯 보인다. 외과 의사가 시간이 없어서 대충 수술하고는 환자의 자가 회복 능력을 기대한다는 말을 한다거나, 기술은 없지만 환자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 믿고 수술을 한다고 하면 우리 모두는 경악할 것이기 때문이다. 

 

 제일 좋은 방법은 모든 부모들이 자녀 양육에 대해 미리 배우고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사회가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처음 부모가 될 때도 그랬고, 둘째가 곧 태어나는 지금도 사회적 제도는 여전히 미비한 수준이다. 경제적 지원만 조금 늘었다. 아이를 키우는 가정에 대한 교육 지원이나 사회적 인식 개선 등의 비경제적 지원은 그대로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성과에만 치중하고 그 저변에 깔린 우리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는 모른 척하다 보니 경제적 지원마저 예산 낭비라거나 액수가 너무 많다는 등의 사회 갈등의 원인 중 하나가 되고 있다. 이런 걸 보면 부모 교육 역시 가까운 시일 내에 이뤄질 것 같진 않다. 그 많은 사회적 지원과 제도가 무색하게 대입이나 취업이 여전히 개인이 해결해야 할 무거운 과제로 남은 것처럼 부모 교육 역시 앞으로도 부모 스스로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책은 자녀 양육서의 고전이자 기본서 같은 존재다.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부모, 교사, 아이들을 상대로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을 연구한 저자는 이 책을 무려 1965년에 썼다. 그리고 거의 6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다. 이것만 보더라도 이 책이 시대나 문화에 상관없이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에게 필요한 통찰을 깊이 담아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 책을 읽으며 '어디서 들어 봤던 내용이다.', '다른 책에서 배운 내용이다.'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러나 잠시 뒤 이 생각에 웃음이 났다. 이는 마치 아빠를 보고 아들 닮았다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 책이 쓰인 연도를 고려한다면 반대로 이 책의 내용을 다른 데서 들어 봤거나 다른 책에서 봤다고 하는 것이 맞을 테니 말이다. 자녀양육서의 고전답게 다시 읽어 보기 위해 접어둔 책 모서리의 양이 방대했다. 책의 내용을 블로그에 옮기는 데도  며칠이 걸렸다. 틈나는 대로 블로그의 글도 자주 읽어 보고 언젠가 책도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